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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退溪)의 연정(戀情)

거짓 없는 진실 2022. 11. 18. 16:56

♥️ 퇴계(退溪)의 연정(戀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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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안동에서 태어난 이황(李滉)은
아호(雅號)가 퇴계(退溪)였습니다.

그의 70년 생애(生涯) 동안
(1501년/연산군7~1570년/선조4년 ) 조선(朝鮮) 중기(中期) 학자(學者)로
또 문신(文臣)으로 유교적(儒敎的) 법도(法道)에 충실했던 그에게도
젊은 한 여인을 향한 애정어린 
한 편의 전설같은 숨은 이야기 하나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48세(歲)때 경치 좋은 단양(丹陽) 군수(郡守)로 부임(赴任) 했는데,
그 고을의 관기(官妓)였던 
18세의 어린 두향을 만나게 됩니다. 

두향은 첫 눈에
대나무처럼 올곧은 
퇴계를 연모(戀慕)하게 되었고,

퇴계도 부인과 아들을 
잇따라 잃었던 터라 
공허(空虛)한 퇴계의 가슴에 
두향이 깊숙히 파고 들어왔습니다. 

30년 
세월(歲月)을 뛰어넘는
사랑의 교감(交感)이고,
반상(班常)의 신분(身分)을 🍎뛰어넘는
로맨스(romance)였습니다. 

두향은 시(詩)와 글(書)과
거문고에 능숙(能熟)했고 
특히 매화(梅花)를 좋아했습니다. 

그녀는 언제나 
퇴계(退溪)의 곁에서 
거문고(금:琴)를 타며 
퇴계(退溪)의 얼굴에서 
미소(微笑)와 기쁨이 떠나지 않게 했던 여인(女人)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랑을 시작한지 꼭 9개월 만에 퇴계가 경상도 풍기(豐基) 군수(郡守)로 전근(轉勤) 발령(發令) 을 받았습니다. 

두 사람 모두에게 
대단한 충격(衝擊)이었고, 

관기(官妓)를 못 데리고 다니는 
당시의 규율(規律)때문에 
결국(結局) 두향을 남겨 두고 퇴계는 혼자 풍기로 떠나야만 했습니다. 

떠나면서 꾸린 퇴계의 짐 속에는
두향이 준 수석(水石)2개와 
매화(梅花) 화분(花盆) 한 개가 있었습니다. 

떠나기 전날 밤에
마주 앉아 주고 받았던 
한시(漢詩)가 백미(白眉)였습니다. 

"死別己呑聲(사별기탄성)
"죽어 이별은 소리조차 나오지 않고"

 生別常惻測(생별상측측)
"살아 이별은 슬프기 그지 없네" 

그리고 
퇴계는 말을 이었습니다.
"내일이면 떠난다 
기약(期約)이 없으니 두려울 뿐이다."

두향은 말 한디 없이 먹을 갈고 난 뒤  
붓을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시(詩) 한수(首)를 썼습니다. 

"이별이 하도 서러워 
 잔 들고 슬피 우는데, 
 어느덧 술도  비워 없어지고

 님마저 가는구나. 
 꽃 지고 새 우는 봄날을 
 어이할까 하노라."

이날 밤의 이별(離別)은
결국(結局) 너무나 긴 이별로 이어져 
퇴계가 70세로 
세상(世上)을 하직(下直)할 때까지 
두 사람은 
한번도 다시 만난 적이 없었습니다. 

퇴계(退溪)가 
부제학(副提學)
공조판조(工曹判書)
예조판서(禮曹判書)로 
승승장구(乘勝長驅)했는데도......

아마도 
두향은 누가 될까하여
퇴계에 대한 그녀의 속 깊은
배려(配慮)였으리라 전해집니다. 

퇴계와 이별(離別) 한 후
두향은 관기(官妓)를 그만두고 
퇴계와 즐겨 다녔던 
남한강(南漢江)강가에 움막을 짓고 
평생(平生)을 살았다고 합니다. 

이별 후 이들은 만나지 못하고 
서로 서신(書信)만 주고받았습니다. 

다음은 퇴계가 
두향에게 보낸 시(詩) 한 소절입니다. 

"黃卷中間對聖賢(황권중간대성현) 
누렇게 바랜 옛 책속에
좋은 말씀 보면서 

 虛明一室坐超然(허명일실좌초연) 
 빈 방에 홀로 조용히 앉았는데 

梅窓又見春消息(매창우견춘소식) 
매화 핀 창가에 봄소식을 다시 보니 

莫向瑤琴嘆絶絃(막향요금탄절현) 
그대도 거문고 마주 앉아
줄 끊겼다고 한탄 말라 

퇴계는 말년(末年)에
안동(安東)에 있는 
도산(陶山) 서원(書院)에서 
조용하게 여생을 지냈는데 

한 때는 
병세가 위독해서 자신도 모르게 
옷을 입은 채로 설사를 하게 되었는데

그 경황에서도 그는 시중드는 사람에게 
불결(不潔)하니 미안한 마음이 든다며 
매화 화분을 딴 방으로 
옮기라고 했답니다. 

그 매화(梅花)가 바로 
두향이 준 것 이여서 
각별(各別)히 애지중지(愛之重之) 하였다는 것입니다.

명종(13대)과 선조(14대) 임금이 
항상 퇴계에게 
큰 벼슬을 내리면서
조정으로 나올 것을 
간곡하게 청했지만, 
그는 
끝내 벼슬을 사양(辭讓)하고 
출세(出世)보다는 
학문(學文)에 전력(全力)했던 
군자(君子)였습니다. 

그러나 
시(詩)와 음악(音樂)과 
한 여인(女人)을 사랑했던 
로맨티스트(romanticist)였고, 

또 달(月)과 산(山)과 강(江)과 
매화(梅花)를 유(類)달리 사랑했던 
풍류객(風流客)이었습니다. 

기록(記錄)에 의하면 
그가 지병(持病)이 깊어 
누워 있던 1570년 
섣달 초여드렛날, 
제자들이 그를 부축하여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습니다.

창문(窓門)으로는 눈부신 겨울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고,
윗목에 있는 매화(梅花) 화분에서는
두세 송이 부푼 꽃망울을 매달고 있는것이 보였는데
퇴계께서

“저 매화(梅花)에 물을 주어라!“

이 말을 끝으로 
선생은 미소(微笑) 띤 표정으로 
앉아서 이승을 하직(下直) 했으니, 

이때 선생의 나이 70세 였습니다. 

그날은 날씨가 맑았는데
오후 다섯시쯤 갑자기 
흰 구름이 집 위로 몰려들더니 
눈이 한 치(약3.3cm)남짓 내렸고
조금 뒤 
선생이 숨을 거두시자 
구름(구름)은 흩어지고 
눈(눈)도 그쳤다는 것입니다. 

두향이 
퇴계에게 주었던
매화(梅花)는 그 대(代)를 이어 
안동의 도산서원(書院)에서 아름답게
그대로 피고 있습니다. 

어느 날 두향이 
안동(安東)의 퇴계에게 
난초(蘭草)를 보냈습니다. 
단양에서 두향과 함께 
가꾸던 난초임을 알아차린 
퇴계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튿날 
새벽에 일어나 
자신이 평소에 마시던 
우물물을 손수 길어 
두향에게 보냈습니다. 

이 우물물을 받은 
두향은 물을 마시지 
못하고 
새벽마다 일어나서
퇴계의 건강을 비는 
정화수(井華水)로 
소중히 다루었습니다. 

어느 날 이 정화수가
빛깔이 변하는 것을 보고
퇴계가 돌아가셨다고
느낀 두향은
소복(素服) 차림으로 
단양에서 머나먼 
도산서원 까지 4일간을 걸어서 돌아가신 님을 뵈었습니다. 
한 사람이 
죽어서야 두 사람은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퇴계 종가(宗家)에서는
두향이 묘(墓)에
벌초(伐草)하고
그녀의 넋을 기린다고 전해집니다. 

퇴계 선생의
파격적(破格的)인 사랑을 
공식적(公式的)으로는 
인정(認定)할 수 없지만, 
그 애달픈 사랑을 
잊지 않는 다는 것이 
귀하고 아름다운 정서(情緖)이고
사람의 최소한의 예(禮)인
모양입니다.

또한 옛날이나 지금이나
여자(女子)는 언제나 
존경(尊敬)하는 님에게는 
일편단심(一片丹心)
변치않는 
숭고(崇高)한 사랑으로 
승화(昇華)시키는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울 뿐입니다.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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