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1949년 6월 청년 장교 안두희, 김일성 추종한 김구를 쏘다

거짓 없는 진실 2024. 2. 17. 09:39

1949년 6월 청년 장교 안두희, 김일성 추종한 김구를 쏘다

(97) 안두희의 김구 암살

안두희, 한독당·김구 노선에 회의
경교장에서 김구와 시국 논쟁 끝에
“영감과 나라를 바꿉시다”며 암살
종신형 선고 후 6.25 발발로 군 복귀
1955년 안두희 수기, 단독범행 주장
1996년 조사보고서, 배후 의문 제기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뒤숭숭한 정국은 김구(1876~1949) 암살이라는 엄청난 사건으로 다시 한번 소용돌이쳤다. 1949년 6월 26일 낮 12시 40분, 73세 김구는 자신의 거처인 경교장에 방문객으로 찾아온 32세 청년 장교 안두희(1917~1996: 범행 당시 육군 포병 소위)의 총탄 4발을 맞고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내가 죽였다’고 자백하는 안두희를 현장에 출동한 경찰이 연행하는 순간, 현역 군인에 대한 관할을 내세운 헌병이 들이닥쳐 안두희를 데리고 갔다 (손세일, 2015, 『이승만과 김구』 7권: 746-749).

육군본부가 7월 20일 발표한 장문의 수사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안두희는 아래와 같은 내용의 지도를 받으면서 한독당과 김구의 사상 및 정치노선에 대하여 점차 회의를 느꼈다. 그것은

1) 5.10 선거에 의한 대한민국 정부수립 부인,

2) 평화통일의 이름 아래 공산당과 제휴를 기도하고 한독당 주요 간부에 대한 북로당원의 포섭,

3) 남북정치협상에 의한 연립정부 수립 기도,

4) 미군 철퇴를 주장하고 철퇴 뒤에는 군사고문단 설치 절대 반대,

5) 미국의 대한 경제원조 반대,

6) 북한정책의 합리성은 찬양,

7) 남한 정부의 혁명가에 대한 박대를 공격,

8) 남한에서 조만간 쿠데타 단행 예언

등이었다.

그리하여 안두희는 탈당을 의도했으나 탈당한 뒤의 테러 위험성을 우려하여 고민하다가 [마침내] 김구의 진의를 타진하기 위해 범행 당일 경교장을 방문했다. 이날 김구는 안두희에게 대포의 성능에 대하여 자세히 물었고 안두희가 영등포 포병대에서 경무대[청와대]나 중앙청을 향하여 정확히 조준할 수 있다고 대답하자, 김구가 만열 [滿悅, 만족하여 기뻐함] 하는 것을 보고 김구의 노선이 대한민국을 전복하려는 공산당의 노선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을 확인하고 논쟁 끝에 사살하게 되었다” (손세일, 위의 책: 757).


김구의 유해.
안두희의 김구 살해 동기는 쉽게 말해 ‘김구가 김일성을 추종하는 노선’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오늘날 운동권 정치인들이 보여주는 ‘종북노선’에 실망해 운동권을 버리고 돌아서는 젊은이들의 판단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다만 실망을 넘어 분노에 치를 떨며 사람을 죽이는 행동으로까지 나간 것이 다르다면 다른 차이점이었다. 안두희는 8월 고등군법회의 재판 끝에 종신형을 선고받았지만, 6.25 전쟁으로 서울이 점령되기 직전인 6월 27일 석방되어 육군에 복귀했다 (손세일, 위의 책: 758).

안두희는 휴전 후 군 납품업 등에 종사했으며, 4.19 이후에는 협박과 테러에 시달렸다. 그는 1965년 곽태영의 칼에 맞았고, 1987년에는 권중휘의 ‘정의봉’에 골절상을 당했다. 이때부터 안두희는 사면초가의 심리적 압박에 쫓겨 횡설수설 혼란을 일으켰다. 1955년 학예사에서 출판한 자신의 옥중수기 『시역(弑逆)의 고민』을 두고 ‘내가 안 썼다’와 ‘내가 썼다’를 오락가락하며 말을 바꾸기도 했다. 1994년 국회법사위 '김구암살진상조사위원회'에 나가서는 실어증을 이유로 증언을 피하며 침묵했다. 마침내 2년 후인 1996년 79세에 안두희는 박기서의 ‘정의봉’에 맞아 결국 절명했다 (인보길, 2024, “김구 암살, 안두희는 왜 쏘았나? 거물간첩 ‘명동백작’ 성시백도 잡혀 죽다” 뉴데일리).

안두희의 김구 암살 배후에 관한 논란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수사기록과 공판기록이 모두 사라진 상태에서 사건 발생 44년 만인 1993년부터 3년 동안 국회법사위는 ’김구암살진상조사위원회’(위원장 강신옥)를 가동해 그 결과를 1996년 ‘김구암살진상조사보고서’로 발표했다. 이 기록은 ‘김구전집편찬위원회’가 1999년 펴낸 『백범김구전집』 ‘제12권: 암살 진상’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이 ‘보고서’조차 김구 암살 사건의 진상 특히 사건의 배후와 관련된 논란을 완전히 불식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손세일, 위의 책: 743-746).

예컨대 2024년 2월 3일 현재 ‘김구기념사업회’ 홈페이지의 ‘암살에 대한 보고’ 버튼 아래 떠 있는 ‘김구암살진상조사보고서’의 ‘맺음말’에는 다음과 같은 의문이 제기되어 있다.

“암살범 안두희의 마지막 증언을 면밀히 분석하면 김구 암살 사건은 안두희에 의한 우발적 단독 범행이 아니라 면밀하게 준비 모의되고 조직적으로 역할 분담된 ‘정권적 차원’의 범죄였다....김구 암살에서 가장 큰 쟁점은 역시 이승만과 미국의 관련성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경우 ‘정권적 차원’의 범죄라는 차원에서 우선 도덕적 책임이 있다. 또한 사건 뒤처리에서 개입한 것이 확인된다. 다만 암살 사건에 대한 사전 개입과 지시는 불투명한 편이다.

미국의 경우 우선 김구의 정치노선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고, 암살 사건의 내막을 알 수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미국 역시 암살에 대한 구체적 지시나 명령을 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암살사건에서 최고위층의 개입을 구체적인 지시명령의 대목까지 확인할 수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다만 최고위층 자체가 하나의 상황을 만들기 때문에 도덕적 책임, 상황적 책임을 물을 수 있다.”

김구의 죽음에 이승만과 미국이 책임이 ‘있다’는 말인지 아니면 ‘없다’는 말인지 분명한 판단이 없는 표현이다. 최대한 적극적 해석을 하면 직접적 증거는 없더라도 김구의 암살이 ‘정권적 차원’의 범죄이기 때문에 당시 정권의 책임자인 이승만은 물론 이승만을 지원한 미국도 도의적, 상황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인 듯싶다. 그러나 여전히 아리송하다. 직접적 증거가 없는 ‘정권적 차원’의 범죄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경교장 2층 김구 집무실 유리창을 뚫은 총탄 자국 너머로 지지자들이 절하고 울면서 조문을 기다리고 있다.
반면에 안두희가 펴낸 『시역의 고민』은 단독 범행이었음을 주장하고 있다. 이 책은 옥중에서 쓴 일기의 형식을 따라 검거된 다음 날인 6월 27일부터 재판정에 서는 8월 3일 바로 전날인 8월 2일까지의 일기로 구성되어 있다. 9쪽 분량을 차지하는 1955년의 서문 첫머리에서 안두희는 이 책을 ‘삼가 이북에 계신 아버님께 올립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서문에서 안두희는 “범행 자체가 비록 우둔하였으나마 순수한 나 자의(自意)의 행동이었고, 필형(畢刑, 형을 마침)의 경위 또한 혼란 중에서도 소정의 법절차를 밟았음에도 불구하고 사회 일부의 방담자(放談者)들은 ‘모 고위층 인물에 사주된 범의(犯意)’이니 ‘모 군부의 지령에 의한 범행’이니 ‘불법의 석방’이니 하는 별의별 왜곡된 풍설을 유포시키고 있사오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라고 하소연하며 단독 범행임을 주장했다 (안두희, 1955, 『시역의 고민』 서문: 5-6).

이 책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대목은 6월 30일 일기에서 암살 당일 김구와 가졌던 논쟁의 주제를 구체적으로 밝히는 대목이다 (53-57 쪽). “국회 소장파와 선생님 사이에 일찍부터 내통되어 있다는 것은 세상의 정평이요...그들과의 관계는 정말 어떤 것입니까?” “선생님께서 남북협상 당시 서울을 떠나시며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협상 다녀오신 뒤에 태도는 어떠셨습니까? 미군의 철퇴를 주장하셨고, 미국의 원조를 거부하셨고, 유엔의 처사를 비방하시면서 급기야는 5.10 선거까지 부인하신 것, 어찌 그 주장하심이 공산당과 꼭 같으십니까?”

“전라도 방면을 순회하실 적에 정부를 부인하시고, 미국을 침략자로 규정하시며, 이승만 박사를 사대주의자로 매도하셨으니, 그렇게도 국민 전체가 쌍벽으로 모시던 두 분의 교의가 끊겼다고 생각될 때에 겨레의 실망이 어떤 것인지 아십니까?” “건국실천원양성소는 무엇하는 기관이며, 혁신탐정소는 누구의 것이며, 또 한독당의 비밀당원 조직망이란 무슨 사명을 부여한 결사입니까? “여순반란은 누가 사주한 것입니까?” “[1949년 5월 부대를 끌고 월북한] 표 소령, 강 소령과 기거를 같이 한 놈은 어떤 놈입니까?” “송진우 씨는 누가 죽였습니까?” “장덕수 씨는 누가 죽였습니까?”

질문을 퍼붓던 안두희가 김구에게 마지막으로 울부짖는다. “영감과 나라를 바꿉시다.” 안두희의 이 질문들은 다음 회에서 설명할 김구와 김일성이 파견한 북로당의 거물 간첩 성시백의 관계를 이해해야만 답이 나온다.

출처 : 자유일보(https://www.jayupres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