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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寬容)을 터득하는는 지혜(智慧)

거짓 없는 진실 2022. 12. 16. 16:54

관용(寬容)을 터득하는는 지혜(智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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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도에 
병자호란(丙子胡亂)의 치욕(恥辱)을 담은 ''남한산성(南漢山城)'' 이라는
영화가 상영된 적이 있습니다.

개략적인 스토리는 이렇습니다.
1636년 12월 청나라 대군이 
공격해 오자 임금과 조정(朝廷)은
한양(漢陽)을 버리고 남한산성으로
피난하게 됩니다.

이때 청나라 군사는 10만명이 넘는데
반해, 남한산성 안에 조선군대는 불과
1만3천명이었고 식량도 부족해서
두 달도 버틸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이미 성(城)밖은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청나라 군대에 유린당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절박한 때에
남한산성 안에 있던 신하들은 두 파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이조 500년의 역사가 말해주듯
조정이 두패로 갈라져 
분쟁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한 쪽은 명나라를 배신하고 
오랑캐인 청나라를 섬길 수 없다며 이들하고는 끝까지 싸우자는
주전파(主戰派)였고, 
🍎
다른 한 쪽은 
종묘사직(宗廟社稷)을 지키고 
후일(後日)을 도모하는 길은
오직 화친(和親)밖에 없다고 
주장한 주화파(主和派)였습니다.

주전파 대표자는 예조판서(禮曹判書) 김상현이었고
주화파 대표자는 이조판서(吏曹判書) 최명길이었습니다.

당시 두 사람의 이념적 갈등은 
서로가 목숨을 걸어야 하는 
명분(命分)의 싸움이기도 했습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조정의 실권을 쥐고 있던 서인(西人)은
명나라를 섬겨왔던 
대의명분(大義名分)을 중시하여 친명배금(親明拜金) 
정책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오랑캐와 싸우겠다는 
김상현의 척화론(斥和論)은 
대신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고,
반면에 최명길의 화친론은 
소수로 매국노(賣國奴)라는 
지탄을 받았습니다.

청나라 군사들이 남한산성을 
이중 삼중 에워싼 절제절명의 
위기 속에서,
인조와 조정 신하들은 
머리를 맞대었지만 
뽀족한 대책이 없었습니다.
계속 항전을 벌리자니 
군사들의 취약함과 
식량이 절대 부족했고,
그렇다고 오랑캐에게 항복하는 것은
더더구나 용납 할 수 없었습니다.

끝까지 싸우자는 주전파가 대세였지만
그 와중에 청나라와 협상을 하자는 
신하 한사람이 있었으니  최명길이였습니다.

최명길이 인조에게 아룁니다.
''전하, 성(城)이 포위되어 
배급로(配給路)가 차단되어 
성(城)안의 백성들이 
굶어 죽기 일보 직전이옵니다. 
원망과 고통이 하늘을 찌를 듯하니 
백성을 무마(撫摩)시키고
종묘사직을 지키는 길은
화친(和親) 밖에 없아옵니다 전하!''

그러자 주전파의 대표자인 김상현이
죽을 때 죽더라도 오랑캐에게 
결코 머리를 숙일 수는 없다고 
최명길을 질타(叱咤)했습니다.

주전파(主戰派)와
주화파(主和派)의 대립 속에
갈등(葛藤)하던 인조왕은
강화도에 피난해 있던 왕실 가족이
청나라 군대에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더 버틸 수가 없었고 결국 
화친(和親)을 주장하는 최명길에게
항복(降伏) 문서를 쓰게 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김상현이 달려와
항복문서를 갈기갈기 찢어버렸습니다.
최명길은 찢어진 종이 조각들을 주우며
김상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대감(大監)은 찢으시오! 
줍는 일은 내가 하오리다''

결국 인조왕(仁祖王)은
1637년 1월30일
삼전도에서 청나라 태종 앞에서 
세 번 절을 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찧는
 삼궤구고두례(三詭九叩頭禮)라는 치욕적인 항복 행사를 치르게 됩니다.

남한산성에서 
치열하게 대립했던 두 사람은 이후, 전범(戰犯)으로 청나라에 
잡혀가게 되어 1643년 
청나라 삼양 감옥에서 만난 두 사람은 
시(詩)를 주고 받으며 
흉금(胸襟)을 털어놓게 됩니다.

먼저 김상현이 읊었습니다.
''조용히 우리 둘의 생각을 찾아보니
문득 백년의 의심이 풀리는구려,''

이에 최명길이 화답(和答)했습니다.
''그대 마음 돌 같아서 돌리기 어렵고
나의 도(道)는 고리같아 
경우에 따라 돌리기도 한다오.''

서로의 생각과 이념은 달랐지만
나라와 백성을 사랑하는 
두 사람의 마음은 똑같았습니다.
누가 옳고 그르냐를 떠나 
둘은 모두 조선의 훌륭한
충신(忠臣)이었습니다.

나라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꼭
한가지로 같을수가 없을것입니다.
우리는 단체나 조직안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는다면 
표현과 방법,
생각과 의식(意識)이 다르다고 해서
분쟁하거나 대립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너와 내가 하나라고 하는 명제아래
관용하고 협력하는 마음을 갖고
상대를 이해(理解)하고
존중(尊重)할 때
상대의 본심(本心)이 보이게 되고
마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나만 충성된 일꾼이 아니라
상대도 훌륭한 충성된 일꾼일 수 있다는
것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할것입니다.
단제 생활과 
조직 생활속에서
그리고
가족생활 속에서도 그 이치(理致)는
꼭 같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분쟁없는 화평한 가정생활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지않겠습니까.

      🌾                🌾                🌾

🏃건강하십시오. 
            즐겁고 행복한 생활 
                    누리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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