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금융 위기는 반드시 다시 온다, 겸손하라

거짓 없는 진실 2023. 3. 23. 19:21

[朝鮮칼럼 The Column] “금융 위기는 반드시 다시 온다, 겸손하라”
광풍이 공황으로 바뀐 ‘뱅크런’ 美 은행 둘이 순식간에 붕괴
금융위기 대가 버냉키는 말한다
“완벽한 화재 예방 불가능하듯 금융위기는 미리 막지 못한다
인간의 약점 인정하고 버티기 위한 시스템 만들어라”

김신영 기자
입력 2023.03.18. 01:30

미국 은행들의 연쇄 파산으로 관련주가 폭락한 지난 15일 미 뉴욕증권거래소의 트레이더가 긴박한 표정으로 지수를 살피고 있다. /UPI 연합뉴스
“광풍이 공황으로 언제 바뀔지는 절대 알 수 없다. 인간의 심리적 연약함을 없애기도 불가능하다.” 벤 버냉키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 의장이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를 회고하며 쓴 책에 적힌 말이다. 유사 이래 금융 위기가 발생하는 과정은 대체로 닮았다고 그는 말한다. 불안이 번지면 앞다퉈 예금을 빼려는 ‘뱅크런’이 발생하고 은행이 쓰러지며 금융 시스템이 붕괴한다.

미국 만화 ‘심슨’엔 개구쟁이 주인공이 장난으로 “지급 불능!”이라 소리치자 뱅크런으로 치닫는 장면이 나온다. 이와 근본적으론 비슷한 일이 최근 현실에서 잇달아 발생했다. 소문이 불안으로, 불안이 뱅크런으로 번지며 사흘 사이 미국의 은행 둘이 잇달아 문을 닫았다. 그 직후 스위스의 글로벌 투자은행 크레디스위스의 예금이 빠져나가며 파산설이 돌았다. 뱅크런이 멀쩡하던 은행을 하루면 무너뜨릴 수 있다는 충격에 은행주가 하루 80%씩 폭락하는 혼란이 발생했다.

많은 경제학자는 뱅크런이 은행의 속성과 맞닿아 앞으로도 반복되리라고 말한다. 지난해 노벨경제학상은 버냉키 등이 받았는데 논문의 주요 소재가 바로 뱅크런이었다. 이들에 따르면 은행은 언제든 빠져나갈 수 있는 (만기가 짧은) 예금을 받아 만기가 긴 대출에 빌려줘 돈을 번다. 이 사업 모델엔 ‘예금자가 한꺼번에 돈을 빼진 않겠지’란 믿음이 깔렸다. 하지만 그 어떤 충격이 발생해 이 전제가 무력화되고 동시다발적 예금 인출이 발생하면 은행은 무너진다.

버냉키가 공저한 금융 위기 회고록 ‘위기의 징조들’을 읽다 보면 좀 허망하다. 뱅크런과 금융 위기를 사전에 막을 방법은 없다고 거듭 강조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이다. “불행히도 금융 위기를 완전히 예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금융은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데, 신뢰만큼 깨지기 쉬운 것은 없다.” 이 회고록의 원제는 ‘화재 진압(Firefighting)’이다. 저자들은 금융 위기를 화재에 빗대 설명한다. 읽다 보면 실제로 공통점이 적지 않음을 알게 된다. 초기에 불씨를 잡지 않으면 큰불로 번지고, 불이 나면 잘잘못 따지기보단 진화(鎭火)부터 해야 한다는 식이다.


지난 10일 파산한 미국 실리콘밸리은행의 한 지점에 지난 13일 예금을 찾으려는 이들이 긴 줄을 선 모습. 미 연방준비제도와 재무부는 예금자보호 한도를 초과하는 예금을 전액 지급할 수 있도록 자금을 지원하기로 했다. /UPI 연합뉴스
불에 탈 연료가 있어야 재앙이 번진다는 사실은 또 하나의 공통점이다. 부실한 비우량 주택 대출이 2008년 금융 위기의 원인이었다고 흔히들 여기지만 버냉키는 동의하지 않는다. 대학 강의에서 한 말이다. “당시 비우량 주택 대출의 전체 규모는 뉴욕 증시가 약간 하락한 날 줄어드는 시가총액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주택 대출의 손실은 불쏘시개 위로 던져진 성냥 역할을 했을 뿐, 바싹 마른 상당량의 가연성 소재가 주변에 없었다면 대형 화재는 나지 않았다.” 그는 과도한 대출, 얽히고설킨 금융 업계, 시대를 따라가지 못한 감독 당국 등이 ‘가연성 소재’였다고 말한다.


지금 한국은 어떤가. 조금만 방심하면 타오를 잠재적 ‘불쏘시개’가 산더미만큼 쌓여 있다. 가계 부채는 세계 최고로 불어났고, 상당수 대출의 담보인 부동산은 가격 거품이 꺼지는 중이다. 부동산 호황기에 시작한 수많은 건설 프로젝트는 PF(프로젝트 금융)라 불리는 복잡한 금융 상품으로 엉킨 상태다. 3년 전 105조원이었던 규모가 지난해 160조원 넘는 수준으로 불어나 있다.

금융 위기의 불씨를 조기에 막을 ‘해자’ 격인 예금자 보호 제도는 빈약하다. 미국의 예금자 보호 한도는 약 3억2000만원, 일본·캐나다도 1억원쯤 된다. 한국은 22년째 5000만원이다. 예금자 보호 한도를 넘어서는 예금은 2018년 말 825조원에서 지난해 1152조7000억원으로 불어나 있다. 뱅크런에 불을 붙일 ‘마른 장작’이 그만큼 많아졌다는 뜻이다. 한도 늘리자는 논의만 몇 년째인데 최근 문의하니 8월쯤 ‘개편 방안’을 낸다며 느긋하다.

‘금융(finance) 사인방’이라며 스스로를 ‘F4′라고 부른다는 금융 당국자들은 최근 회의를 하고 “한국 금융기관은 충분한 기초 체력을 가졌다. 직접적인 영향은 제한적”이라고 발표했다. 불안을 조장할 필요야 없겠지만 모든 금융사의 체력이 정말 탄탄한가. 선진국 은행이 쓰러지는 판에 대형 은행 과점 해소가 필요하다며 중소형·특화 은행 추가 설립을 추진하는 정부의 자신감도 불안하다.

금융 위기 전문가 버냉키는 말한다. “상상력 부족과 기억력의 한계라는 인간 본성 탓에 금융 위기는 피할 수 없다. 우리가 위험을 찾아내기 전에 위험이 우리를 찾아낼 것이다. 위기가 닥쳤을 때 버티기 위한 시스템의 강건함을 구축하기 위해 중앙은행과 정부는 모든 일을 해야 한다. 우리는 겸손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나의 결론이다.” 지금 우리가 귀 기울여야 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