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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가장 시급(時急)한 것은?

거짓 없는 진실 2022. 12. 22. 10:22

우리에게 가장 시급(時急)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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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한쪽으로 치우침 없이
조화(調和)와 화합(和合)을 
중시(重視)하는 음식으로 
대표적인 것이 탕평채(蕩平菜) 라는 음식이라고 합니다.

탕평채는 초나물에 녹두묵을 썰어넣고 고기뽁음과 데친 미나리, 구운 김등을 섞어 만든 묵무침으로 청포묵무침
이라고도 한답니다.
탕평채(蕩平菜)라는 이름도 탕탕평평(蕩蕩平平)이라는
말에서 유래한 말이라고 했습니다.
탕평채의 탄생에는 조선(朝鮮)시대의
놀랍고도 슬픈 사연(事緣)이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세상의 많고 많은 음식들 가운데
탕평채(蕩平菜)만큼이나
의미심장(意味深長)한 이름도
없을것 같다고 합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 이름은 
대부분 재료(材料)와 
요리방법(料理方法)에 따라서 
음식 이름이 붙어지는데 반해
탕평채(蕩平菜)는 
조선시대(朝鮮時代)
사색당파(四色黨派)에서 유래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우리가 국사(國史)에서 익히 배웠듯이
조선시대는 당쟁(黨爭)이 유독 심했죠.
분당(朋黨)은 14대 선조대왕 때 부터
시작이 되었는데 선조 7년(1574년)에
이조화랑(정3품) 추천에서 부터 
발단이 되었습니다. 

이조화랑인 오건(吳健)이 
사직(辭職) 하면서 후임에 
김효원(金孝元)을 추천했는데 이조참의(정3품) 심의겸(沈義謙)이
이에 반대했고 훗날에
김효원도 심의겸의 동생이 이조좌랑에 적합지 않다고 거절했습니다.

이런일로 인해
김효원과 심의겸이 사이가 나빠졌고
이일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는
두사람 만으로 끝나지 않는
한국사(韓國史)의 비운(悲運)이 시작되었습니다.

김효원을 따르는 사람과
심의겸을 따르는 사람들간에
반목(反目)과 시기(猜忌)와 다틈이
끝나지 않고 이어져 갔습니다.

김효원이 한양의 동쪽인 
건천동(지금의 충무로 부근)에 살았다고 해서 김효원을 따르는 
사람들을 동인(東人)이라 불렀고,

심의겸은 한양 서쪽인 
정릉에 살고 있었다고 해서
심의겸을 따르는 사람들을
서인(西人)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와같은 동인과 서인의 분파(分派)가
우리 민족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기게 됨,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동인과 서인의 치열한 당쟁의 결과는
일본 풍신수길이 
조선을 침략할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음에도 
제대로 방비(防備)할 수 없게 만든 
요인이 되었던것입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년전인,
1590년 조선정부는
일본에 사절단 두명을 파견했습니다.
풍신수길의 침략야욕을 살펴보기 위한
목적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정사(政事) 서인파(西人派) 황윤길과
부사(副使) 동인파(東人派) 김성일의
귀국 보고가 상반(相反)되었습니다.

황윤길(서인)은 일본이 조선을 반드시
침략할 것이라고 보고한 반면
김성일(동인)은 전쟁은 절대 없을것 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속한 동인과 서인 내부에서도
치열한 논쟁을 벌리고 있었는데,
결국 당시 실권을 잡고 있던 동인 측이
김성일의 의견을 좇아 
전쟁이 없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조선은 거의 무방비상태에서
임진왜란을 맞이하는 비운(悲運)을 겪었습니다.
조선은 이렇게 해서 선조 때부터
시작된 붕당정치(朋黨政治)는
갈수록 심각해져서 
분열에 분열을 거듭했습니다.
 
동인(東人)이 남인(南人)과 북인(北人)
서인(西人)은 노론(老論)과 소론(小論)
으로 분열 되었습니다.

그리고 
남인은 정남과 탁남으로 나뉘어졌고
북인은 대북과 소북으로 분열되었는데,
16대 인조임금 때부터는
서인(西人)이 대부분 조정의 실권을
장악했습니다.

서인에서 나뉘어진 
노론(老論)과 소론(小論)은
또 분열(分裂)되어
노론은 벽파와 시파로 갈라지고
소론은 완론과 준론으로 분열됐습니다.

조정(朝廷)의 대소사(大小事)는
각 당의 이해관계(利害關係)에 따라
좌지우지(左之右之)되었고
국토가 숙대밭이  되었고
사사건건 대립하다보니
재정이 바닥나고 국력이 크게 낭비되니
민생(民生)이 도탄(塗炭)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목숨을 앗아간 환국(換局)도
모두가 당쟁(黨爭)의 결과였습니다.

이와같은 당쟁의 폐해(弊害)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영조(21대)가 당파를 고루 등용하는
탕평책(蕩平策)을 논하는 자리에서
처음 등장했던 음식이 있었습니다.

21대 영조는 궁중에서 
신분이 가장 낮은 무수리(※궁중에서
나인의 세숫물 시중을 맡았던 여자 종) 출신인 숙빈 최씨가 낳은 아들입니다.
참고로 숙빈 최씨는 숙종 임금 4번째 
첩인 장희빈 다음의 첩이기도 합니다.

장희빈이 낳은 20대 경종왕이 
영조가 올린 게장과 생감을 먹고 죽자,
영조가 경종을 독살(毒殺)했다는
의심을 받기도 했습니다.

노론(老論)측의 절대적 도움으로
왕이 된 영조임금은 재위 기간 내내 
경종 독사설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아들인 사도세자(思悼世子)가
영조의 정적이라고 할 수 있는
소론(小論)측을 지지하고,
거기에다 사도세자를 둘러싼 엄청난
역모(逆謨)의 소문까지 들리게 되자
급기야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어
죽이고 말았습니다.

뒤늦게 후회를 하게 된  영조 임금은 당파가 아닌 인물(人物)위주로 
인재를 등용하겠다는 의지를 담아 탕평책(蕩平策)을 정책(政策)으로 삼게 되었고 그 자리에 
신하들에게  음식을 내 놓았는데
그 음식이 탕평채(蕩平菜)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탕평채에 들어가는 다양한 재료의 색은
각 붕당(朋黨)을 상징하는데
김의 검은색은 북인(北人)
미나리의 푸른색은 동인(東人)
청포묵의 흰색은 서인(西人)
고기의 붉은 색은 남인(南人)을
의미 했다고 하는데 
탕평채에는 분열(分烈)을 끝내고
화합(和合)하자는 
영조 임금의 굳은 의지가
담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 대한민국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가 양 극단으로 갈라져
국민의 가슴을 쓰리게 하는 
정치를 중단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특히 지연(地緣)과 학연(學緣) 
당파(黨派)나 사상(思想), 
이념(理念)적 다툼과 대립을 
하루 빨리 멈추어야 합니다
분단된 슬픔을 달래기도 힘든데
우리는 여.야가 화합하고 단결해도 
저 이북의 계략과 술책에 이기기도
쉽지 않는데 밤낮없이 싸우고만 있으니
복장(腹臟)이 터질 지경입니다.

국가와 민족의 번영과 발전을 위해
여.야와 온 국민이 화합(和合)하여 하나가 되는 모습,
월드컵 출전 선수들에게 보내던
응원의 모습과 같은 일치 단결된
모습을 우리의 일상(日常)에서 
늘 볼 수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오늘 하루를 보냅니다.

🏃오늘도 건강하시고 즐겁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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