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인 김동길
김동길 교수는 서양문화사 강의를 연세대 강의실이 아니라 강당에서 했다.
2000명이 넘는 수강생을 수용할 강의실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출석부가 77쪽에 달했다. 출석 체크가 불가능했다. 그래도 결석자는 적었다.
청강생이 더 많이 들어와 강당 정원을 초과할 때가 많았다.
그의 강의는 힘이 있었고 유머가 넘쳤다.
김 교수를 흉내 낸 최병서의 개그보다 그의 강의가 더 웃겼다. 엄청난 인기였다.
글과 말에서 동시에 달인은 드물다. 김 교수는 드문 사람이었다. 타고났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20여 년 동안 매일 아침 6시 미국 한인 방송을 통해 강연을 했다.
방송국 사정 때문에 갑자기 결방 소식을 들은 날에도 카메라 앞에서 그냥 강연했다고 한다. 글도 200자 원고지 석 장씩 매일 썼다.
김 교수는 “혼수상태가 될 때까지 글을 쓰겠다”고 했다. 실제로 병석에 들기 직전인 지난 설날까지 글을 올렸다.
그는 강골이었다. 대학 때 도봉산으로 단체 친목회를 갔다가 깡패들을 만났다. 가진 것을 내놓으라고 협박당했다. 김 교수 혼자 다 때려눕혔다.
당시 유일한 여학생이던 고(故) 심치선 교수의 생전 증언이다. 그런 분이 하루 한 끼만 드셨다. 자택에서 식사를 함께 해보고 의문이 풀렸다.
그릇 크기가 대단했고 양도 상당했다. 비상한 기억력도 유명했다. 시 300수를 외웠다고 한다. 몇 편 암송을 부탁한 적이 있다.
시마자키 도손, 윤선도, 윌리엄 워즈워스의 시 3편을 순식간에 암송했다. 김 교수는 “키를 눌렀는데 시가 안 나온다? 그때가 인생 끝나는 때”라고 했다.
손윗누이인 고 김옥길 선생처럼 그도 사람을 좋아했다. 대문을 열어 놓고 살았고 종종 자택에서 냉면 모임을 했다. 많은 식객이 신세를 졌다.
그 가운데 부하까지 몰고 와 냉면을 가장 많이 먹고 간 사람은 5공 때 김 교수를 핍박했던 전두환 전 대통령이었다. 50여 명이 100그릇 넘게 먹고 빈대떡까지 싸갔다고 한다.
노년엔 여든 넘은 지인들과 함께 100세 클럽을 만들었다. 멤버였던 백선엽 장군과 김병기 화백이 백 살을 넘기고 세상을 떴다. 김형석 교수와 김창묵 선생은 여전히 건재하다.
11년 전 생일, 김 교수는 세브란스병원 의료원장에게 편지를 보냈다. “내가 죽으면 장례식, 추모식은 일체 생략하고 내 시신은 의과 대학생들의 교육에 쓰여지기 바란다”고 했다.
그리고 “누가 뭐래도 이 결심은 흔들리지 않는다”며 도장까지 찍었다. 그는 일생 자유민주주의를 전파하면서 살았다. 가는 길도 자유인이었다.
- 선우정 논설위원
金東吉 박사님, 空手來 空手去를
끝까지 실천하셨습니다.
박사님 말씀대로 눈 한번 깜빡했더니 그새 白髮이 되는 게
인생입니다.
그렇습니다. 잘난 인생, 못난 인생,
있는 者, 없는 者,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민주화 보상금을 거부하신 박사님,
진정 이 민족 이 국가를 사랑하신 분입니다.
"민주화"로 사골 우려먹듯 평생을 자랑질하며 사는 인간들도 있는데
"민주화 운동했으면 됐지 보상은 무슨 보상?"
그래서 박사님은 진정 '큰그릇'
입니다.
이제 하늘의 별이 되신 박사님 대한민국은 또 한 분 "어른"을 잃었습니다.
어제는 거짓말 오늘은 패악질
내일도 분탕질만 일삼는 무리들이
들끓는 나라에 우리는 국가의 진정한 어른을 보냈습니다.
우주의 한 티끌에 생명을 담아
地球라는 點에서 반짝거리다가 가는 삶,
무엇이 그리 대단하길래 권력을 쥐고 惡行을 일삼는단 말입니까!
토마스 칼라일은 외쳤습니다.
"하나의 삶은 두 永劫사이에 끼인 덧없는 閃光이다........."
자신이 섬광인 줄 모르는 인간들은
오늘도 영원히 살 것처럼 날뛰고 있습니다.
삼가 박사님의 冥福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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