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작동 국립묘지에 묻힌
이승만 대통령의 비석
(碑石)에 얽힌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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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1만년 (9221년)
역사상 처음으로
조국과 민족에게 자유와 민주
평등과 인권, 법치의 세상을
만들어 준 이승만 대통령은
임종(臨終)하시기 전날,
유언(遺言)이 되어버린,
이승만 대통령의 마지막
기도 내용 입니다
하나님, 저는 너무나
늙고 지쳤습니다.
사랑하는
우리민족을 위해서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대한민국
대한의 민족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게 하소서.
기독교 신자인 대통령은,
성경 갈라디아서 5장1절에
있는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한,
평소에 늘 하던 기도를
유언으로 남기고,
1965년 7월 19일 0시 35분
하와이 마우나라니 요양병원
2층에서
고국산천 가는 길목,
태평양이 바라다 보이는
병실에서,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와
양자 이인수씨가 지켜보는
가운데, 파란만장했던
삶을 뒤로 하고,
90세를 일기(一期)로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그런데,
국장(國葬)은 커녕,
국립묘지 안장조차
곤란하다고 거부당한
건국(建國)대통령의
죽음이였습니다
살아 생전에
프란체스카 영부인에게
내가 죽거든
내 조국 한국땅에 묻어달라
약속하고 맹세하라던
이승만 대통령의
소원이 였기에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던
영부인이 가족장으로
하겠으니 국립묘지에
안장케 해달라고
강하게 요구하여,
결국 동작동 국립묘지에
가족장으로 결정을
얻게 되었습니다.
65년 7월 21일 밤,
하와이 한인기독교회에서
교민 등 700여 명이 모인
영결식장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누운 관(棺) 위에
태극기가 덮였고,
고인의 얼굴을 볼 수 있도록,
상반신쪽 관뚜껑을 반쯤
열어 놓았습니다.
대통령의 독립운동 당시
동지 겸 비서 임병직(林炳稷)
당시 인도 총영사
(6.25 당시 외무장관)이
개인자격으로 조문했으며
美 정.재계 인사 및 현지인과
교민의 조문이 이어지던 중,
그 영결식장에 미국인
윌리엄 보스윅
(William Bothwick)이
들어 섰습니다.
윌리엄 보스윅
그는 누구인가?
이승만이
하와이 망명 당시인
1919년,
상해 임시정부 대통령에
선출됐다는 연락을 받았으나
일제의 현상 수배자
(현상금 미화 36만불)
신세가 되어 부임하지
못하다가,
이듬해 1920년 12월,
중국노동자들 시체를 싣고
상해로 가는 중국화물선
제일 밑칸의 시체실에,
비서겸 동지 임병직과
함께 숨어,
20여일의 항해끝에
상해로 갈 수 있었는데,
그때 이승만이 시체실로
숨어 들어가
밀항할 수 있도록
도와줬던 이승만의
50년의 절친이신
장의사 출신의 사업가 였던
그가 바로 윌리엄 보스윅
입니다.
그가 영결식장으로
들어섰습니다.
대통령 유해 앞에 선 그는,
고인의 얼굴에 덮여있는
베일을 걷어올리더니,
그 얼굴에 손을 얹고
어루만지며 절규했습니다.
친구야 !
내가 자네를 알아,
내가 자네를 알아,
자네가 얼마나 조국을
사랑했는지,
내가 자네를 잘 알아,
자네가 얼마나
억울 한지를 내가 잘 알아
친구야,
그것 때문에 자네가
얼마나 고생해 왔는지,
바로 그 애국심 때문에,
친구가 그토록 비난받고
살아온 것을
내가 자네를 잘 알아
영결식이 끝난 다음
이승만 대통령의 유해는
美 존슨 대통령이
최고의 예우로 모시라면서
배려한 美공군 C-118
특별기로,
퇴역한 前 미8군 사령관
밴플리트 장군 등
운구 호송단 14인의
정중한 호위를 받으며
하와이 공항을
출발 했습니다.
1965년 7월 23일,
한국시간 오후 3시경
대통령의 유해는 김포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오매불망 그렇게도
오고파하고 그리워 하던
고국땅을,
살아서 오지 못하고,
영접 나온 5,000 시민의
애도속에, 죽어서야
밟았습니다.
유해는 김포가도를 지나
이화장(梨花莊)으로
모셔졌습니다.
1965년 7월 27일
동작동으로 가는 날,
이침 8시에 상여(喪輿)는
이화장을 나섰습니다.
대통령을 추모하는
573장의 만장(輓章)이
따르고,
거리로 쏟아져 나와
애도하는 100만 인파의
곡성이 가시는 길을
지척대게 했습니다.
대통령 유해는 8시간이
넘는 긴 운구 끝에,
오후 4시45분 에야 겨우
동작동에 이르렀습니다.
7월 27일 오후5시40분
하관(下棺)을 하는 순간,
하늘에서
한줄기 소나기가 주루루룩,
하늘도 비운의 대통령을
눈물로 영접하시는듯
했습니다.
위대한 한국인 이승만,
조국과 민족을 위한
험난했던 인생여정을 마치고,
호국영령(護國英靈)이
되어 떠나셨습니다.
그런데,
비석(碑石)은 없었습니다.
몇 년이 지나도록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쓸쓸히 묻힌 대통령.
이승만 대통령이 떠나
가신지 6년이란
세월이 지난 1971년,
승당 임영신 承堂 任永信,
초대 상공장관,
前중앙大총장
대통령을 마음속에
평생 모시겠다고,
호를 승당承堂
이승만承,집堂)이라고
지은 대통령 최측근,
승당 임영신 그분이
미국 나들이길에
하와이에 들려,
이승만 대통령이
하와이 망명 당시인
1921년 만든, 독립운동가
이승만 후원단체
대한동지회 大韓人 同志會
동지들을 만났습니다.
대통령 묘소에 비석이
없다 라고 개탄하자,
동지들이 들고 일어나서
비석은 우리가 세우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프란체스카 여사는,
대통령 서거후 모국(母國)
오스트리아 친척집을
떠돌며 살다가,
육영수(陸英修) 여사의
배려로 1970년 영구 귀국해
있던 프란체스카 여사,
그분이 하와이 동지들의
뜻을 전해 들었습니다.
돌(石)만 보내주면
비문(碑文)과 비석작업은
우리가 하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승만 대통령 제2의 고향,
정든 땅 하와이 돌(石)은
인천항을 거쳐 동작동으로
운반되어, 비로소 작은 비석
한 개를 세우게 되었는데
헌시를 조각한 비석을
세웠습니다
영부인 프란체스카
도너 리(李),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파란눈의 퍼스트 레이디,
그 분도 1992년,
남편의 뒤를 따라
이 세상을 하직(下直)
했습니다.
손때 묻은 성경책과,
독립운동 시절부터
간직해온 빛바랜 태극기,
대통령이 남북통일
(南北統一)이라 쓴
휘호를 가슴에 안고
떠났습니다.
향년(享年) 92세.
영부인이 돌아가시자,
양자(養子) 이인수 박사가
대통령과 합장(合葬)하고서
비석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처음 비문(碑文)은,
건국대통령 우남 이승만
내외분의 묘
(建國大統領 雩南 李承晩
내외분의 墓)라고
새겼습니다.
그런데,
디 제이 피 (DJP)
정권이 들어섰습니다.
1998년 얘기인데
김대중이 김종필의 도움으로
39만 557표차로,
보수의 이회창을 눌렀고
세상이 진보 쪽으로
바뀌었으며 진보의
세상이 된 것입니다.
진보 측에서
이승만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건국(建國) 대통령
비석은 세울 수 없다
왜?
이승만을 건국(建國)
대통령이라 하지 말라.
왜? 왜? 왜?
이 나라는 이승만이
건국한 나라가 아니다.
이승만은 건국(建國)
대통령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보면
1919년 상해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
이승만이 였고
해방이후 3년동안
미군정 치하로
다스려 지면서
박헌영 남노당에
공산당 일당들은
남한 인구중에
80%를 공산당에
입당 시켰다고 선언했고
종로2가 우미관 일대에
김두한 깡패 건달 협객
조직들은 태능에 있는
공산당 핵심 조직을
쳐부수고 해산시켰으며
여기저기 공산당 행사를
모조리 깨부셔 버렸는데
나라 이름도 없었던
비운의 역사 속에서
나라 이름도 없었고
정부도 없었으며
대통령도 없었던
3년간의 무정부
시대로 있다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을 건국했고
초대 대통령에
이승만이 당선 되었는데
이분을 건국建國 대통령
이라고 하면 않되는가요?
우리가 볼때는
분명히 건국 대통령이
맞다고 봅니다
결국, 양자(養子) 이인수는
김대중 대통령에 의해서
건국建國' 비석을 치우고
초대初代'로 쓴 비석을
교체해서 다시 세웠습니다.
그리고,
건국建國' 비석은
초대'(初代) 비석 뒤쪽,
대통령이 묻힌 곳에서
조금 떨어진 묘지 마당에
묻었습니다.
나라는 새
카톡펌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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