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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이 오면 잊히지 않고 떠오르는 시

거짓 없는 진실 2024. 7. 14. 12:27

7월이 오면 잊히지 않고 떠오르는 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고교시절 교과서에 실린 시 한편입니다


내 고장 7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던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먹으면
두 손을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집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 이육사(李陸史). <청포도>


이육사가 이 시를 지은 것은 1930년대, 그의 나이 30대 초반 무렵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내 고장'이라 일컫는 곳이 그가 태어나 16세까지 자랐던 고향인 경북 '안동'인지, 아니면 형무소에서 나와 친척 형 집에 잠시 머물렀던 '포항'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시에 나오는 '하늘빛 푸른 바다'와 '흰 돛단배'로 미루어 경북 포항이 아니었을까 짐작이 됩니다. 안동에서는 바다를 볼 수 없기 때문이지요.

다른 시들에 비해 시 <청포도>가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것은 이 시가 지닌 독특한 시각적 효과 때문이기도 합니다.

마을에 전해오는 오랜 전설처럼, 푸른 포도가 주저리 주저리 열린 바닷가 언덕에서 바다를 바라보면, 하늘과 맞닿은 먼 곳에 수평선이 길게 펼쳐져 있고, 그 수평선을 넘어 흰 돛단배 하나가 바람을 안고 곱게 밀려 옵니다.

그 배에는 시인이 그토록 애타게 기다려 왔던 손님이 타고 있을 것이고, 청포를 입고 고달픈 몸을 이끌며 그가 찾아오면 시인은 그와 함께 식탁의 은쟁반에 놓인 청포도를 두 손이 함뿍 젖도록 따먹을 꿈을 꿉니다.

이 시가 지닌 시각적인 효과를 더욱 아름답게 돋보이게 하는 것은 '푸른색'과 '흰 색'의 조화입니다.

'청포도', '하늘', '푸른 바다', '청포(靑袍)''가 나타내는 푸른 색과, '흰 돛단배', '은쟁반', '하이얀 모시 수건'이 상징하는 흰 색의 대비는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시를 읽는 이들에게 한 폭의 수채화처럼 맑고 아름다운 '순수(純粹)'를 안겨 줍니다.


이 시로서 이육사 시인을 오직 순수한 서정(抒情)을 추구하는 낭만파 시인으로만 여길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실제로 그는 '낭만'과는 거리가 먼 열렬한 행동파 독립운동가였습니다.

그는 '의열단(義烈團)'의 열혈 단원이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에 가장 적극적이고 치열하게 맞섰던 독립운동 단체의 행동대원이었지요. 

이육사가 39년의 짧은 생애 동안 17번이나 감옥을 출입한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이육사'라는 이름이, 1927년 대구은행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할 때, 수인번호 '264'에서 따온 것이라는 사실은 비교적 많은 이들이 알고 있지요.

독립운동을 하는 동안에도 그의 생활은 아무런 외부의 지원없이 궁핍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형제가 서로 의지하여 밤낮으로 열심히 일하고 있으나, 보잘 것 없어서 아침에는 끼니거리가 없고, 저녁에는 잠잘 곳이 마땅치 않으니 한탄스럽기 짝이 없을 뿐입니다."
대구에서 동생과 살며 신문기자로 일할 때 친구에게 쓴 편지 내용입니다.

독립운동을 위해 1943년 베이징에 건너갔던 이육사는 그 해 돌아가신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귀국했다가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지요. 

피체(被逮) 후 중국 베이징 형무소로 이감되어 대나무로 살점을 도려내는 등의 참혹한 고문을 받다, 결국 1944년 1월 16일 39세를 일기로 그곳에서 순국(殉國)하고 맙니다.


죽는 날까지 이육사가 꿈꾸었던 것은 오직 하나, 조국의 독립이었고, 이에 대한 열정은 그의 시들에 '기다림'의 표현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시 <청포도>의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올 손님'이라든지, <광야(曠野)>의 '백마 타고 올 초인(超人)'은 그가 그토록 오랜 세월동안 애타게 기다려 온 독립된 조국을 상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에 덧붙여, 다른 시 <꽃>에도 조국의 독립에 대한 기다림이 절절한 비원(悲願)으로 잘 나타나 있지요.

"북쪽 툰드라에도 찬 새벽은
눈 속 깊이 꽃망아리가 옴작거려
제비떼 까맣게 날아오길 기다리나니
마침내 저버리지 못한 약속이여."

이토록 애달프게 기다리던 조국의 독립을 못 본채 먼 이역 땅에서 외롭게 숨져간 이육사의 유해는 1960년 그의 고향 안동에 이장되어 비로소 독립된 조국에서의 안식을 얻게 됩니다.

.
많은 이들은 이육사를 낭만적인 시인으로서만 기억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대표작인 <청포도>가 지닌 아름다운 서정성 때문에 말이지요.

그러나 '시인'으로서의 역할은 그의 전 생애의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7월을 맞으며, 일제에 맞서 처절하게 싸웠던 독립운동가로서의 이육사에 대해 많은 분들이 보다 깊은 관심을 가져 주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그의 생애를 짧게나마 되짚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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