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년전 소중한 이야기 한토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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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은
우리나라 광부(鑛夫)들이
독일에 들어가기 이전에는 이웃나라 유고슬라비아, 터키, 아프리카 등등
인건비 싸구려 국가에서
수 많은 광부들을 수입하여
일을 시켜본 경험이있는 나라 입나다.
하지만 이들 나라에서 데리고 온 광부들은 아주 나태(懶怠)하였고
생산성이 아주 낮아 결국 광산을 폐쇄(閉鎖)할 수밖에 없었던
경험이 있는 독일이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에서 데리고 온 광부들이 투입(投入)되면서 생산량이 엄청나게 높아지자
독일 신문들이 대대적으로 보도를 하였고,
이렇게 근면한 민족을 처음 봤다면서
한 달 급여를 두배로 올리고
보너스를 줘야 한다는
여론(與論)이 일어났습니다.
한편
당시 서독에선
국민소득(國民所得)이 올라가니
3D (Difficult/힘들고)
(Dirty/더럽고)
(Dangerous/위험한)
업종(業種)같은 어려운 일을
기피(忌避)하는 현상은 독일은 물론
어느 나라가 마찬가지 였습니다.
당시 독일에선 야간에
일을 하겠다는 간호사가 없었습니다.
특근수당(特勤手當)을 많이 준다 해도 필요 없다는 것이였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한국 간호사들에 대하여서는
아주 후진국에서 왔다고 해서
일을 맡길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국 간호사들이
죽은 사람 시체를 알코올로 닦고 수의(壽衣)를 입히는 일까지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한국 간호사들은
임종(臨終)이 가까운
환자들에게 평안한 죽음을 맞도록
위안(慰安)과 안락(安樂)을 베푸는
봉사(奉仕)활동도 앞장서다 보니
호스피스(Hospice) 병동 근무자는
한국 간호사들의 몫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천박(淺薄)한 환경 속에서도
한국 간호사들은 자신들의
영위(營爲)를 위한 목적 보담도
가난한 조국을 위해서라는
일편단심(一片丹心)으로
환자가 사망하면
그 시신을 붙들고
유가족(遺家族)들과 함께 슬퍼하면서
염(殮)을 하는 것을 보고
독일 국민들이 한국 간호사들에 대해 깊은 감명을 받았다는 뉴스와 함께
큰 화제가 되기까지 했습니다.
우연(偶然)한 기회에
독일 간호사가 자리를 비우든지 아니면 갑자기 간호사가 없을 경우면
주사도 놓고 성심성의(誠心誠意)껏
환자를 다루는 것을 보고
독일 병원 당국자들이
너무 감탄(感歎)하고 놀라서
한국 간호사에 대한 인식(認識)이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하면서
한국인을 신뢰(信賴)하게 되었고
의료 분야를 한국 간호사 들에게 맡기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더욱이 위급(危急)한 사고환자가
피를 흘리면서 병원 응급실에 오면
한국 간호사들은
몸을 사리지 않고
그 피를 온몸에 흠뻑 적시면서도 응급환자를 치료하는가 하면,
만약 피가 모자라
환자가 위급한 지경(地境)에 빠지면
한국 간호사들은
직접 수혈을 하여 환자를 살리는 등
이런 헌신적 봉사를 하는 것을 보고 “이 사람들은 간호사가 아니라 천사다”라고 극찬(極讚) 하면서
그 때부터 한국 간호사를 바라보는 생각과 태도(態度)가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런 사실들이 서독 전역의
신문과 텔레비전에 연일 보도되면서
서독은 물론 유럽국가 전체가
"동양에서 천사들이 왔다"고 대대적으로 보도 되었습니다.
우리 간호사들의 헌신적 노력이
서독 국민들의 가슴을 울리게 되자,
서독 국민들은 이런 나라가
아직 지구상에 있다는 것이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라며,
이런 국민들이 사는 나라의
대통령을 한번 초빙(招聘)하여
감사 표시를 하자는 여론이
서독 전국에 확산(擴散)되었습니다.
특히 독일 큰 도시에 진출한 간호사들의 실력과 봉사정신이
독일 간호사들 못지않다는
인정이 확산되고 있던 시기에
한.독협회 '바그너 의장(議長)'은
한국 대통령을 초빙하자고 하면서
병원에 오면 꼭 한국 간호사만 찾는데 왜 그러느냐고 기자가 물으니
'주사를 아프지 않게 놓는
특별한 기술자'라고 칭송하면서
주변을 놀라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한국 광부와 간호사들에 대한
신뢰와 인기가 독일 국민들 속에 하늘을 찌를듯 충천(衝天)하고
있을 때 서독정부 당국도
'그냥 있을 수 없다'고 하면서 그때,
박정희 대통령을
서독에 공식 초청(招請)하기로
결정 하였습니다.
이것이 단군(檀君) 이래 처음으로
우리나라 국가 원수(元首)가
독일에서 국빈으로 초청받는
첫 번째 사례(事例)가 되었습니다.
우리로서는 안 갈 이유가 없었습니다. 오지 말라고 해도
우리나라 입장으로서는 가야할 다급(多急)한 실정이었습니다.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은
모든 준비를 완료 하였으나
제일 큰 난제(難題)는 먼나라에
일행이 타고 갈 비행기가
한국엔 없었습니다.
한국이 가진 항공기는
일본 정도만을 왕복하는
소형 여객기 뿐이였습니다.
이 비행기로는 먼 나라
독일까지 갈 수 없었습니다.
(이는 마치 오늘 날 북한 김정일이
평양에서 싱가폴 까지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 위해 타고 갈 비행기가 없어 세계에 큰 수모를 당한 꼴과 똑 같은 그런 가난하고 빈약한 시대였습니다)
우리 정부가 여러가지 방법을
강구(講究) 하던차 미국 항공기인
아메리칸 에어라인을
전세(專貰) 내기로 결정 하였는데
이때 미국 정부가
''군사 쿠데타를 이르킨 나라의 대통령을 미국 비행기에
태워갈 수 없다''해서
미국 비행기 마져 타고 갈 길이 무산(霧散)됨으로
곤경(困境)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궁리(窮理)하고 연구한 것이,
어차피 창피는 당하게 되었는데
한 번 부딪쳐 보자,
이래서 당시 동아일보 사장이었던 최두선 선생께서
특사(特使)로 서독을 방문하여,
<뤼브케> 대통령을 예방한 자리에서
''각하!' 우리나라에서는
서독까지 올 비행기가 없습니다.
독일에서 비행기를 한 대
보내주실 수 없겠습니까?''
당시를 회고(回顧)하는
여러 증언에 의하면
서독 정부 당국이 깜짝 놀라
말을 못하더란 것입니다.
결국 합의(合意)가 된 것이
서독에서 홍콩까지 오는 여객기가 서독에서 서울로 먼저 와서
우리 대통령 일행을
1 ‧ 2등석에 태우고 난 후에
홍콩으로 가서
이코노미 석에 일반 승객들을
탑승케 한 후
홍콩을 출발
서독의 수도 Born(본)에
도착 했다고 합니다.
1964년 12월 6일,
루프트탄자(Lufthansa) 649호기를
타고 간 대통령 일행은
공항에서 Luebke(뤼브케) 대통령과 에르하르트 총리의 영접을 받고
공식 정상 회담을 한 후에,
다음 날,
<뤼브케> 대통령과 함께
우리 광부들이 일하는 탄광지대 '루르' 지방의 함브론(Hamboron) 탄광에 도착 했습니다.
그곳에는 서독 각지에서 일하던
간호사들이 모두 집결 하였고 대통령이 도착하기 직전까지 탄광에서 일하던 광부들이
탄가루에 범벅이 된 작업복을
그대로 입고 강당에 모여
대통령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새까만 광부들의
얼굴을 본 박정희 대통령은
목이 메기 시작하더니
애국가도 제대로 부르지 못하였고, 연설 중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광부들과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한 덩어리가 되어 부둥켜안고
통곡의 바다를 이루었으니 정말 감동적 장면이 아닐수 없었습니다.
독일 대통령도 울었고
참석한 모든 서독 귀빈들은 물론
현장을 취재하던 독일 기자들마저 모두 뒤어켜 울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떠나려는 대통령을 붙들고 놓아주지를 않았던
광부들과 간호사들은
눈물 바다를 이룬 현장에서
"대한민국 만세",
"대통령 각하 만세"를 외치며
겨우 겨우 힘겹고 어렵게
눈물로 석별을 고(告)하였습니다.
돌아오는 고속도로 차안에서
계속 우는 우리 대통령에게
Luebke(뤼브케) 대통령께서
자신의 손수건으로
박정희 태통령의 눈물을
닦아 주기도 하였는데
특히 그때의 여론은
대통령을 붙들고 우는
나라와 백성이 있다는 이 사실에
당시 유럽의 모든 나라들 여론이
경제적, 정치적 우위(優位)에 있던
북한의 인기와 여론을 완전히 뒤집어
한국으로 돌아서게 한 획기적인
귀한 사건이라 전하고 있습니다.
박 대통령께서 방문 후
서독은 제3국의 보증이 없이도
한국에 차관(借款)을 공여하겠다는
획기적 내부 결정을 하였지만
국제관례와 법을 도외시할 수 없는 상황이였기에 그대신
한국 광부와 간호사들이 받는
월급을 일개월간 은행에
예치하는 조건으로 대체(代替)하고
당초 한국이 요구하였던
차관 금액보다 훨신 더 많은
3억 Mark(마르크)를 서독정부가
한국 정부에 공여(供與)하였습니다.
당시 서독에 취업한
우리 광부와 간호사들이
본국에 송금한 총액은
연간 5000만 달러였는데
이 금액은 당시 한국의 국민소득의 2%를 차지하는 엄청난 금액이었으며
광부와 간호사가
한국에 송금된 미화달러가
국내 고속도로와
중화학공업에 투자되었던 것입니다.
이후
한국과 서독 간에는
금융 문제는 물론 정치적으로도 진정한 우방(友邦)이 되었습니다.
서독에서 피땀 흘린
광부와 간호사들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조국 근대화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위대한 '국가유공자'들임에도
지금 우리들은 그들을
잊어버린 것은 아니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개인의 경제사정도 있었겠지만
국가는 당연히 그들에게 '국가유공자'로 대우하여야 하다는
제 개인 의견에 공감해 줄 날이
오기를 기다려 봅니다.
아울러
나는 독일 나라를 생각하면 항상
아우토반(AutoBahn)을 잊을수 없고
간과(看過)할 수 없습니다.
독일 히틀러의 결단이
촉매제가 되어 건설한
약 1만3천 km에 달하는
세계 최초의 고속도로 이름입니다.
히틀러는 이 도로를
전쟁을 위하여 만들기 시작했지만
이 도로가 있었기에
2차 세계대전 후
독일 경제부흥의 초석이 된 것입니다.
이 도로를 달리던
우리 박정희 대통령께서는
어떤 결심과 계획이 있었기에
세 번이나 차를 세우고서
아우토반 도로 상태를
면밀히 조사 분석 하면서
이때 경부 고속도로를 구상하셨는지
그곳에서 울음을 참지 못했다는 일화(逸話)가 다시금
생각나게 하였습니다.
'모든 길은 Rome(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단순히 물리적인 현상만을
말하는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지금
미국이 패권을 지배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독일의 공업기술은 여전히
세계를 호령(號令)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독일이 자동차 산업을 세계 1위로
단연 세계 절대 우위(優位)에
놓이게 한것도 다름아닌
히틀러의 아우토반 고속도로 건설과
깊은 연관이 있을수 밖에 없습니다.
박정희 대통령께서
아우토반 고속도로를 달리다
타고 가던 승용차를 세번이나 멈추고
대통령이 우셨다는 비화(秘話)는
독일이란 나라를 생각하며
'아우토반'을 떠 올리면서
꼽십어 볼 필요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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