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제주4.3폭동 사건

거짓 없는 진실 2022. 9. 22. 10:04

《파도는 내일도 친다/제21화》

☆제주4.3폭동 사건☆

오늘은 지난 이야기에 이어 사건 경과와 이 사건이 우리 국민과 정부에 미친 영향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사건 경과
    ●제주 4.3사건은 1948. 4.3~ 1957. 4.2 까지 만 9년동안 제주에서 남로당의 직접 지도하에 발생한 폭동사건입니다.

●폭동을 지휘한 지휘자는 남로당 제주지부 군사부장 겸 한라산 인민 유격대장(이하 유격대장) 김달삼이었음
 *김달삼의 본명은 이승진이며, 제주도 대정면 태생이며, 일본 중앙대학 재학중 학병 장교로 임관 된 자임

 *해방 후 대정중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던 중 대구 폭동사건이 발생하자, 대구로 가서 배후에서 대구폭동을 조종하고 46년 12월에 제주도로 숨어들었음

*이때부터 제주도당 군사부장이 되어 폭동의 지휘자가 되었음

●4.3사건 이전단계
  *제주에는 1948년 4.3사건 이전인 1947년 3.1절 기념행사 때부터 이미 폭동을 일으킬 전주곡이 울리고 있었음

*47년 2월에 3차에 걸쳐 각 면단위 인민위원회를 통하여 3.1절 행사 격문이 나돌고 행사 참여 독촉장이 날아들었음

 *드디어 3월 1일 제주북국민학교와 오현중학교 등에 3만여명의 군중이 집결하여 남로당 제주 지부장 주도로 3.1절행사와 시가행진 시작

*행사구호는 3.1절 기념행사와 전혀 관계없는 #인민 위원회로 정권을 양도하라! #박헌영 선생 체포령을 철회하라!는 것이었음

●행진하던중 기마경찰의 말 다리에 어린이가 부딫치는 사고를 빌미로 군중들이 "경찰이 어린애를 쳤다!  저놈 잡아라!"라고 소리치며 돌팔매질을 하며 경찰서로 뛰어들자 보초를 서고 있던 경찰이 발포하여 군중 6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 함

●3.1 절 발포를 빌미삼아 3월 10일 제주도 전 관공서와 산업체가 총파업에 돌입(166개단체/41,211명)
이파업은 제주에 혁명기지를 세우고 사회를 전복시키기 위해 계획적으로 일으킨 파업이며 여기에 경찰도 100여명 가담하였음

*이에 군정청 경무부장 조병옥은 파업에 적극 가담한 경찰 66명을 파면 조치하고 도지사와 경찰청장을 교체하였음(47.3.22)

●48년 4.3사건 시작
  *남로당이 제주에서 4.3사건을 일으킨 목적은 육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섬에 혁명기지를 건설하고 남한만의 총선거를 저지하여 남한만의 단독정부 설립을 저지하기 위한 것이었음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김달삼의 악질 유격대는 48년 4월 3일(일) 새벽에 제주지역 24개 경찰지서 중 12개 지서를 기습공격하여 무자비한 살인ㆍ방화를 저질렀음

이날 하루만에도 40여명의 경찰이 살해 당하고 경찰가족들 30여명이 총과 죽창에 의해 무참히 살해 당하였음

●군경토벌 작전
  *갑작스런 기습을 받은 경찰은 대대적인 역습을 하였으나, 경찰 혼자의 힘으로는 안되어 모슬포에 주둔하고 있는 제 9연대를 투입하였으나, 별다른 성과가 없었음

제주도 9연대 안에는 이미 남로당 세포조직이 쫙 깔려 있어 토벌군의 정보가 실시간으로  유격대 김달삼에게 전달됨으로 작전을 나가면 판판이 깨지거나 허탕을 치는 것이었음  

*상황이 그렇게 된 이유는 연대내 1대대에 문상길 중위가 김달삼과 내통하는 푸락치였기 때문이었음

●김익렬 9연대장과 인민유격대장 김달삼의 평화협상

*미 군정에서는 쌍방간의 출혈을 줄여보고자 9연대장과 인민유격대장의 평화협상을 주선하여 4월 28일에 구억초등학교에서 협상을 하였으나, 인민유격대의 협상조건 위반으로 결렬되고 말았음

*인민유격대로부터 공격을 당한 책임과 9연대 병력의 집단 탈영, 협상안 결렬 드에 책임을 물어 김익렬 연대장을 보직해임하고 후임 연대장에 박진경 중령을 임명하였음
(48.5.6)

*박진경은 김익렬과 같은 학병출신으로 군사영어학교를 나온 사람이었음

●박진경 연대장의 암살
  *박진경 연대장은 전임자와 달리 토벌작전을 강력하게 추진함으로써 인민 유격대  활동이 약화 되었음  

*인민유격대장 김달삼은 9연대 푸락치 문상길 중위에게 연대장을 제거(암살)하라는 지령을 내렸으며, 문상길은 부하 손선호 하사에게 구체적인 지시를 하였으며,  손선호 하사는 6월 17일 자정에 잠자는 박진경 연대장의 머리와 심장에 총을 쏘아 살해하였음

*제주 9연대 병력도 제주 현지에서 모병한 사병들이었으며, 이들 대부분이 사회에서 남로당에 가입한 당원들이었음

이러다 보니, 40명씩 60명씩 떼거지로 무장탈영하여 한라산 유격대로 들어간 것임

*문상길과 손선호는 체포되어 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언도를 받고 48년 9월 23일 수색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음

●박진경 연대장 후임으로 최경록 중령이 잠시 보직되었다가 그만두고 송요찬 중령이 연대장으로 보임되어 강력하게 인민유격대를 몰아붙여 2대 유격대장  이덕구를 사살하였으며, 남로당 푸락치 오일균 소령을 간첩혐의로 체포하는 등 전과를 크게 올렸음

●초대 인민 유격대장 김달삼이가 48년 8월에 해주에서 개최한 인민대표자 대회에 참석하러가고  이덕구가 2대 유격대장이 되었는데, 이덕구도 학병장교 출신으로 일찌기 남로당에 가입하여 김달삼과 인민유격대에서 활동하다 자리를 물려받은 것임

●오일균은 9연대 2대대장으로 있으면서 문상길과 함께 인민 유격대에 총과 실탄 등을 제공해주고, 토벌작전 비밀을 넘겨주는 등 간첩질을 하다 송요찬 연대장에게 꼬리가 잡혀 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이 언도되어 49년 3월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음

●이덕구의 선전포고와 계엄령 선포 

이덕구 인민유격대장은 죽기전  48년 10월 24일 그의 존재감을 과시하기 위해 대한민국 정부에 선전포고를 하고 9연대에 대해 과감한 공격을 가하였으나, 송요찬 연대장과 후임 함병선 연대장 그리고 제주지구 전투사령관 유재흥의 반격으로 작살이 났으며,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여 제주도 전지역을완전히 장악하였음(48년 12월) 

*인민유격대는 1954년까지 6명이 남아 있다가 1957년 4월 2일 마지막으로 오원권(39세)이 생포됨으로써 지긋지긋한 제주 4.3폭동은 종지부를 찍었음

■한국정부와 국민에게 미친영향

   ●남남갈등을 조장하여 이웃을 원수로 만들었음
●선량한 국민 1,764명을 비참하게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러 가족이 해체되는 경우를 초래하였음

●경찰관 120명이 무참하게 살해되고 군인 146명이 전사하는 사태가 발생하여 신생국의 군과 경찰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혔음

●정부는 이 사건으로 5.10총선이 흔들리기도 하여 단독정부 수립에 일부 영향을 받기도 하였음

■결 론
   제주는 지리적으로 한반도의 최남단에 자리잡고 있어 기후가 따뜻하고 풍광이 아름다운 낙원으로 각광을 받던 곳인데 공산주의자들의 불장난으로 쑥대밭이 된 비극의 땅이 되어 깊은 상처를 안게 되었던  땅입니다.

4.3사건 74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이에 대한 명확한 진상규명 없이 그것이 민주화 운동이니 뭐니 하는 말장난으로 국민의 눈을 현혹하는 무리들이 있어 대단히 우려스럽 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에 나와 있듯이 인민유격대는 제주도에 혁명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선두에서 투쟁을 한 것이 부명하며  그 과정에서 무고한 양민을 대량으로 살상하는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다시는 이 땅에 그런 불상사가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제주 4.3사건을 요약정리해 보았습니다.

 

카 톡 펌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