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편지] 등불은 문을 밀지 않고 방을 밝힙니다
4세기 북아프리카 타가스테에 모니카라는 여인이 살았습니다. 남편 파트리키우스는 이교도였고 성미가 불같았습니다. 아들 아우구스티누스는 누구보다 명석했지만 방탕했고, 청년이 되자 마니교에 빠져들었습니다. 한 지붕 아래 가장 사랑하는 두 사람이 모두 그녀의 신앙 바깥에 있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어머니를 이렇게 기억합니다. 남편이 화를 낼 때 모니카는 맞서지 않았습니다. 노여움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조용히 자기 뜻을 설명했습니다. 아들은 어머니가 말보다 삶의 모습으로 남편에게 하나님을 전했다고 썼습니다. 파트리키우스는 생의 끝자락에 신앙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아들 앞에서는 모니카도 조급했습니다. 한 주교를 찾아가 아들과 논쟁해서 그 잘못을 바로잡아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주교는 거절했습니다. 지금은 새로운 사상에 들떠 있어 누구의 말도 들을 때가 아니니 그냥 두고 주님께 기도만 하라고, 언젠가 스스로 읽다가 그 오류를 깨닫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주교 자신이 어린 시절 마니교에 몸담았다가 그들의 책을 읽고 베끼던 중에 빠져나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래도 모니카가 눈물로 매달리자 주교가 말했습니다. "가십시오. 이런 눈물의 자식은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가족의 구원을 바라는 마음은 사랑에서 시작됩니다. 명절이면 식탁에는 모두 모이는데 예배의 자리에는 빈자리가 보입니다. 가족사진 속에서는 함께 웃고 있지만, 영원한 나라에서도 함께할 수 있을지 생각하면 마음 한편이 시립니다. 그래서 말을 꺼냅니다. "이번 주에는 교회에 같이 가자." 처음에는 부드럽게 권하다가 반응이 없으면 목소리가 높아집니다. "그렇게 힘든 일을 겪고도 아직 모르겠니?" 말에는 사랑이 담겨 있지만 듣는 귀에는 압박으로 들립니다.
심리학자 잭 브렘은 선택의 자유가 위협받을 때 일어나는 저항을 '심리적 반발'이라고 불렀습니다. 강요받는다고 느끼면 사람은 권유의 내용보다 빼앗긴 자유를 되찾는 데 먼저 마음을 씁니다. 옳은 말을 더 세게 할수록 상대가 반대쪽으로 물러서는 까닭입니다.
가족 사이에서는 말만 전해지지 않습니다. 그 말을 해 온 사람의 지난 모습도 함께 들립니다. "교회에 가라"는 한 문장 뒤로 식탁에서 냈던 화, 끝내 사과하지 않은 잘못, 가족보다 낯선 이에게 더 친절했던 시간이 따라옵니다.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사람을 대하는 방식을 '나와 너'와 '나와 그것'으로 나누었습니다. 가족이 '전도해야 할 대상'으로만 보이기 시작하면 한 사람은 어느새 '너'가 아니라 '그것'이 됩니다. 그가 교회를 멀리하게 된 사연을 듣기보다 잘못부터 바로잡게 되고, 사랑하는 가족이 나의 신앙 성적표가 되고 맙니다.
등불은 문을 밀지 않고 방을 밝힙니다. 가족 구원의 길도 상대를 밀어붙이는 데서가 아니라 믿는 사람이 먼저 말씀 앞에 서는 데서 열립니다. 잘못했을 때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너에게 상처를 주었구나. 미안하다"라고 말하는 일, 힘든 일을 겪는 가족을 몰아세우지 않고 곁에 앉아 주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좋은 삶이 가족을 구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의 온유와 정직은 복음을 대신하지 못합니다. 다만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우리의 삶이 가리지 않게 할 수는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죽어 가는 아들을 살려 달라며 예수님을 찾아온 왕의 신하가 나옵니다. 왕궁에서는 사람을 부리는 관리였지만 아들의 병상 앞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버지였습니다. 그는 함께 내려가 달라고 거듭 청했지만, 예수님은 한 말씀만 주셨습니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요4:50). 손에는 증거가 없고 귀에는 말씀만 있었습니다. 그는 그 말씀을 믿고 길을 나섰고, 내려가는 길에서 아들이 살아났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성경은 그 뒤의 과정을 자세히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죽어 가는 한 아이로 시작된 이야기가 온 집안의 믿음으로 끝났다고 기록합니다.
이 이야기가 모든 가정의 구원을 자동으로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의 생명을 만들지 못했듯이 우리도 가족의 영혼을 살리지 못합니다. 생명을 주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니 조급함으로 가족을 끌고 갈 필요도 없고, 오래 걸린다고 포기할 이유도 없습니다.
모니카는 그 뒤로도 여러 해를 기도했습니다. 386년 늦여름, 밀라노의 한 정원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집어서 읽어라"라는 아이의 노랫소리를 듣고 로마서를 펼쳤습니다. 주교의 말대로 그는 누군가의 논쟁이 아니라 스스로 읽은 말씀 앞에서 무너졌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모니카는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등불은 닫힌 문을 억지로 밀지 않습니다. 제 방을 밝힌 채, 문틈으로 빛이 새어 나갈 때까지 오래 그 자리를 지킵니다. 믿는 한 사람의 기도와 온유, 진실한 사과와 거두지 않는 사랑이 어느 날 가족의 마음에 질문 하나를 켤지도 모릅니다. "당신을 그렇게 바꾸어 가는 분은 누구입니까?"
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요4:53)
열린편지/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6.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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