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편지] 길이 막히면 마음이 먼저 지도를 지웁니다
휘튼대학 대학원에 리처드라는 신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는 욥기에 관한 논문을 썼고, 교수는 그것을 책으로 발전시켜 보라고 권했습니다. 리처드는 필립 얀시에게 원고를 봐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얀시는 가능성을 알아보고 몇 달 동안 그와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약 1년 뒤 출판 계약까지 이루어졌고, 리처드는 얀시에게 서문을 부탁했습니다.
책이 나오기 직전, 리처드가 얀시를 찾아왔습니다. 자신이 쓴 내용을 더 이상 믿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부모의 이혼을 막아 달라는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약속되었던 일자리는 다른 사람에게 돌아갔고 약혼녀는 갑자기 그를 떠났습니다. 몸에도 잇달아 이상이 생겼습니다.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밤늦도록 하나님을 찾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침묵뿐인 것 같았습니다. 욥에 관해 책을 쓴 사람이 정작 자기 삶의 욥기 앞에서 무너졌습니다. 얀시의 《하나님, 당신께 실망했습니다》는 그 청년이 남긴 질문을 따라갑니다.
사람을 무너뜨리는 것은 실패 하나만이 아닙니다. 실패를 읽는 방식이 더 무서울 때가 있습니다. ‘이번 일이 안 되었다’가 어느새 ‘내 일은 늘 안 된다’로 바뀌고, 조금 더 지나면 ‘나는 안 되는 사람이다’가 됩니다. 마지막에는 오지도 않은 내일까지 불러와 ‘앞으로도 달라질 것은 없다’고 판결합니다. 길 하나가 막혔을 뿐인데 마음은 지도 전체에서 길을 지워 버립니다.
심리학자 스티븐 마이어와 마틴 셀리그먼은 1960년대 후반 ‘학습된 무기력’으로 알려진 현상을 연구했습니다. 피할 수 없는 고통을 거듭 경험하면 나중에 피할 길이 생겨도 시도가 약해지는 현상이었습니다. 반세기 뒤 두 사람은 신경과학의 성과를 토대로 초기 설명을 다시 검토했습니다. 피할 수 없는 고통 앞에서 나타나는 수동성 자체가 학습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 행동으로 상황을 바꿀 수 있다’는 통제의 경험을 배울 때 수동성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 적용해 보면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결론이 마음을 지배하기 전에, 아직 할 수 있는 한 가지를 찾아야 합니다.
낙심한 날 가장 위험한 질문은 “왜 안 되었을까?”가 아닐지 모릅니다. “이제 무엇이 소용 있을까?”입니다. 첫 질문은 원인을 살피게 하지만 둘째 질문은 손을 놓게 합니다. 실패를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인생 살이에서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실패는 수없이 다가옵니다. 그 실패 때문에 문명은 발전하고 인간은 인간답게 됩니다. 실패에게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해석권까지 넘겨줄 필요도 없습니다.
성경에도 원고 앞에서 낙심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서기관 바룩입니다. 여호야김 왕 제4년, 그는 예레미야가 불러 주는 말씀을 두루마리에 받아 적었습니다. 그 무렵 바룩은 탄식했습니다. “나는 나의 탄식으로 피곤하여 평안을 찾지 못하도다.”
이듬해 아홉째 달, 그 두루마리가 왕 앞에서 낭독되었습니다. 겨울 궁전에 앉아 있던 여호야김은 서너 단락이 읽힐 때마다 서기관의 칼로 잘라 화롯불에 던졌습니다. 마침내 두루마리 전체가 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룩에게 모든 일이 곧 좋아질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네가 너를 위하여 큰 일을 찾느냐 그것을 찾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생명을 붙드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두루마리를 펴게 하셨습니다. 바룩은 예레미야가 불러 주는 말씀을 처음부터 다시 적었고, 거기에는 이전보다 많은 말씀이 더해졌습니다. 불은 두루마리를 태웠지만 말씀까지 지우지는 못했습니다.
복음도 막힌 길이 곧바로 다시 열린다는 약속은 아닙니다. 제자들의 눈에 십자가는 모든 길이 끊어진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 자리에서 죄와 죽음을 이기셨고, 빈 무덤으로 인간이 끝이라고 생각했던 자리에 새 길을 내셨습니다.
그 길이 언제나 더 쉽고 더 형편 좋은 길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때로는 내려놓아야 하는 길이고, 견뎌야 하는 길이며, 결과를 보지 못하면서도 충성해야 하는 길입니다. 믿음은 내가 그린 지도를 하나님께 관철하는 일이 아니라, 지도가 지워진 자리에서도 길 되신 그분을 놓지 않는 일입니다.
리처드가 얀시 앞에 내려놓은 것은 욥기에 관한 원고였지만 어쩌면 자기 삶의 지도도 함께 내려놓았는지 모릅니다. 오늘 누군가의 책상 위에도 계획했던 대로 쓰이지 않은 인생의 페이지가 놓여 있을 것입니다.
낙심한 날에는 지도를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막힌 것은 한 길일 뿐일 수 있습니다. 내가 그려 놓은 길이 사라졌다고 해서 하나님의 인도까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길에서도 걸음을 아시는 분은 여전히 계십니다. 닫힌 문 하나가 집 전체를 잠그지는 않습니다. 막힌 길은 끝이 아니라 방향을 묻는 자리입니다. 길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내가 그린 길이 사라진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16:9)
열린편지/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6.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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