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글

달력이 봄을 정하지는 못합니다

거짓 없는 진실 2026. 9. 16. 12:12

[열린편지] 달력이 봄을 정하지는 못합니다

윌리엄 윌버포스는 몸이 약하고 체구가 작은 사람이었습니다. 스물다섯 무렵 복음주의 신앙으로 회심한 그는 1787년 노예무역 폐지를 자신의 사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1789년 5월 12일, 그는 영국 하원에서 열두 개의 결의안을 제시하며 노예선 안에 사람들이 어떻게 실려 왔는지를 조목조목 밝혔습니다.
의회는 들었습니다. 그러나 표결은 미루어졌습니다. 그날부터 그의 달력에는 해마다 같은 안건이 되돌아왔습니다.

1791년 2월 24일, 여든일곱 살의 존 웨슬리가 그에게 마지막 편지를 보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바로 이 일을 위하여 당신을 세우신 것이 아니라면, 당신은 사람과 마귀의 반대에 지쳐 쓰러지고 말 것입니다.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마십시오.”
엿새 뒤 웨슬리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두 달이 채 지나지 않은 4월 18일, 윌버포스가 제출한 폐지안은 163 대 88로 부결되었습니다.

이듬해에는 형편이 달라지는 듯했습니다. 1792년 4월 2일, 폐지 원칙이 230 대 85로 다수의 지지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점진적으로’라는 말이 붙으면서 폐지 시점은 뒤로 밀렸고, 법안은 상원에서 멈추었습니다.
1793년에는 61 대 53, 1795년에는 78 대 61, 1799년에는 84 대 54로 다시 패했습니다. 1796년 3월 15일의 표결은 74 대 70이었습니다. 불과 네 표 차이였습니다. 그날 폐지에 찬성하던 여러 의원이 오페라를 보러 가느라 의회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윌버포스는 그들만 참석했어도 법안이 통과되었을 것이라며 탄식했습니다.
그날 승패를 가른 것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누가 의석에 앉아 있었느냐였습니다.
1807년 2월 23일, 노예무역 폐지 법안은 하원 제2독회에서 283 대 16이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통과했습니다. 새뮤얼 로밀리가 윌버포스에게 경의를 표하자 의원들이 일어서서 환호했습니다. 윌버포스는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첫 폐지안을 제출한 때부터 열여덟 해가 흘러 있었습니다.
1791년에 옳았던 일이 1807년에 새로 옳아진 것은 아닙니다. 열여덟 해 동안 달라진 것은 진리가 아니라 표의 수였습니다. 표결은 달력과 같습니다. 달력은 날짜를 기록하지만 봄을 만들어 내지는 못합니다. 1791년의 달력에 아직 봄이 적혀 있지 않았을 뿐입니다.

1951년 심리학자 솔로몬 애시는 대학생 쉰 명을 대상으로 간단한 선분 비교 실험을 했습니다. 제시된 선과 길이가 같은 선을 고르는 일이었습니다. 혼자 판단하는 조건에서는 오답률이 1퍼센트에도 미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미리 짜 둔 사람들이 차례로 똑같은 오답을 말하자 결과가 달라졌습니다. 참가자들은 결정적인 열두 번의 시행에서 평균 약 32퍼센트나 다수의 오답을 따랐습니다. 네 사람 가운데 세 사람가량은 적어도 한 번 자기 눈으로 본 것을 접고 군중의 답을 말했습니다.
선의 길이는 그대로였습니다. 달라진 것은 그 길이를 말하는 입의 수였습니다.

키르케고르는 “군중은 비진리다”라고 말했습니다. 다수가 언제나 틀렸다는 뜻이 아닙니다. 군중 속에 숨으면 누구도 자기 이름으로 판단하고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다수의 목소리는 판단에 참고할 중요한 자료이지만, 그 자체가 진리의 기준은 아닙니다.

우리도 때때로 표에 밀립니다. 회의에서 밀리고, 직장에서 밀리고, 가정에서도 밀립니다. 밀려난 사람의 마음에는 두 가지 위험이 찾아옵니다. 하나는 ‘내가 틀렸던 것일까’ 하며 자기 양심까지 포기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을 밀어낸 사람들을 미워하며 마음이 비뚤어지는 것입니다.
표에 진 날보다 그다음 날이 더 위험한 까닭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반드시 물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다수가 나를 반대한다고 해서 내가 옳은 것은 아닙니다. 다수가 진리를 결정할 수 없듯, 소수라는 사실도 내 주장을 진리로 만들어 주지는 못합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몇 사람의 지지를 받았느냐가 아니라, 내 판단이 말씀과 사실과 양심 앞에서 검증되었느냐는 것입니다.

성경은 다수의 힘보다 먼저 존재하는 기준을 말씀합니다.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출 23:2)
두라 평지에 악기 소리가 울리자 모든 백성과 나라와 각 언어를 말하는 사람들이 금 신상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 넓은 평지에 선 사람은 세 명뿐이었습니다. 표를 세었다면 그들은 셈에 들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왕 앞에 끌려온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풀무불에서 건져 내실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한마디를 더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 3:18)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바른길에 선 사람을 끝까지 붙드는 것은 언젠가 자신이 옳았음이 드러나리라는 기대만이 아닙니다. 결과가 자신을 증명해 주지 않아도 하나님 앞에서 옳은 길을 걷겠다는 믿음입니다. 그는 승리로 자기 의로움을 입증하려 하지 않고, 패배를 이유로 진리를 버리지도 않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사람들의 표결에 지셨습니다. 빌라도는 무리를 만족시키려고 바라바를 놓아 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겼습니다. 그날 광장의 다수는 이겼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구원은 그 표결에서 진 분에게서 나왔습니다.

윌버포스는 노예무역이 폐지된 뒤에도 노예제 자체를 없애는 일에 남은 생애를 바쳤습니다. 1833년 7월 26일, 대영제국 식민지의 노예제를 폐지하는 법안의 통과가 확실해졌다는 소식이 그의 병상에 닿았습니다. 사흘 뒤 이른 아침, 그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 법은 이듬해 8월 1일부터 시행되었습니다. 비록 도제제도라는 불완전한 과도기를 남겼지만, 오랜 노예제에 문을 닫기 시작한 중대한 전환점이었습니다. 윌버포스는 자기 달력에서 그날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보지 못할 봄을 위하여 겨울의 길을 걸었습니다.

오늘 내가 옳다고 믿는 길이 사람들의 선택에서 밀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말씀 앞에서 그 길을 살펴야 합니다. 옳다면 미움 없이 견디고, 틀렸다면 체면 없이 돌아서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선 사람은 다수의 박수로 자신을 증명하지 않으며, 소수의 외로움으로 자신을 의롭다 하지도 않습니다.
표는 오늘의 결정을 기록할 뿐입니다. 마지막 판단은 표를 세는 사람들에게 있지 않습니다. 달력이 봄을 정하지 못하듯, 사람의 수가 진리를 정하지 못합니다. 나침반은 박수 소리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해시계는 그림자의 수를 세지 않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고전4:3–4)

열린편지/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26.9.16.

 

카톡펌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