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편지] 해는 지지만 길은 끝나지 않습니다
1631년 2월 25일, 사순절 첫 금요일이었습니다. 런던 화이트홀 궁전의 설교단에 세인트폴 대성당 주임사제 존 던이 올랐습니다. 자리에는 찰스 1세가 앉아 있었습니다.
오랜 병으로 몸은 야위었고 목소리는 희미했습니다. 듣는 이들에게 그는 살아서 설교하는 사람이라기보다 무덤에서 잠시 돌아온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우리는 어머니의 태 안에서 이미 수의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수의는 잉태된 순간부터 우리와 함께 자랍니다.”
설교가 끝난 뒤 사람들은 수군거렸습니다. 존 던이 방금 자기 장례설교를 하고 내려왔다고.
며칠 뒤 그는 목수를 불러 장례용 항아리 모양의 받침을 만들게 하고, 화가를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옷을 벗고 수의를 두른 채 받침 위에 올라서서 두 눈을 감았습니다. 야윈 얼굴만 수의 밖으로 내놓고, 얼굴은 동쪽을 향했습니다. 동쪽에서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모습이었습니다.
완성된 그림은 침대 곁에 놓였습니다. 그는 죽음을 바라보려 한 것이 아니라, 죽음 너머의 부활을 바라보며 남은 시간을 살고자 했습니다. 한 달여 뒤인 1631년 3월 31일, 그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그림을 본떠 만든 대리석 기념상은 세인트폴 대성당에 세워졌습니다. 1666년 런던 대화재로 옛 대성당이 무너졌을 때에도 살아남은 몇 안 되는 기념상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죽음을 모르지는 않습니다. 다만 죽는 사람은 언제나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장례식에 다녀오면서도 고인의 삶보다 주차장 출구를 먼저 찾습니다. 며칠이 지나면 어제와 같은 일로 다투고, 없어도 될 것을 하나 더 가지려고 애씁니다. 죽음을 보면서도 자기 죽음만은 보지 않는 재주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죽음을 떠올린다고 저절로 지혜로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심리학자 필립 코촐리노와 동료들은 죽음을 생각하는 두 가지 방식을 비교했습니다. 한쪽 참가자들에게는 자기 죽음을 떠올릴 때 드는 감정만 적게 했습니다. 다른 쪽 참가자들에게는 불이 난 건물에 갇힌 상황을 구체적으로 상상하게 했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무엇을 생각할지, 자신의 삶을 어떻게 평가할지, 남겨진 가족은 어떻게 살아갈지를 쓰게 했습니다.
결과는 달랐습니다. 돈과 지위 같은 외적 가치를 중시하던 사람들은 죽음을 막연하게 떠올렸을 때 오히려 더 탐욕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마지막 순간과 살아온 삶을 구체적으로 성찰한 뒤에는 자기 몫을 더 챙기려는 경향이 뚜렷하게 줄었습니다.
막연한 죽음의 공포는 손을 움켜쥐게 하지만, 정직한 죽음의 성찰은 손을 펴게 합니다. 죽음 자체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 앞에서 더는 자기 삶을 속일 수 없게 된 사람이 겸손해집니다.
성경에서 모세만큼 큰일을 맡은 사람도 드뭅니다. 그는 바로 앞에 섰고, 홍해를 건넜으며,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은 놀라울 만큼 조용합니다. 느보산에 올라 요단 건너편 약속의 땅을 바라본 뒤,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한 채 생을 마쳤습니다. 그의 무덤이 어디 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모세라고 아쉬움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가나안에 들어가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을 때, 그는 끝내 그 뜻을 받아들였습니다. 자기 뒤를 이을 여호수아를 세우고, 자신이 밟지 못할 땅으로 백성을 보내며 손을 놓았습니다. 사십 년 동안 이끌어 온 백성을 문 앞에서 넘겨줄 수 있었던 것은, 그 문을 여시는 분이 따로 계신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생애가 끝난다고 하나님의 일이 끝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모세는 약속의 땅을 얻지 못했지만, 자기에게 주어진 마지막 하루를 잃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가능하다면 시작한 일을 모두 끝내고 떠나고 싶어 합니다. 세운 계획을 이루고, 책임을 다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앞날까지 정돈해 놓은 뒤 마음 편히 눈을 감고 싶습니다. 그러나 인생은 좀처럼 그렇게 끝나지 않습니다. 읽다 만 책이 남고, 풀지 못한 문제가 남고, 이루지 못한 꿈과 더 사랑하지 못한 사람들이 남습니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삶에는 언제나 미완성의 한 페이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마지막에 필요한 것은 모든 일을 끝내는 능력이 아니라, 끝내지 못한 일을 내려놓는 믿음인지 모릅니다. 내가 마감하지 못한 것을 하나님께서 마감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건너지 못한 요단은 여호수아가 건넜고, 모세가 밟지 못한 땅을 다음 세대가 밟았습니다. 한 사람의 생애는 끝났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계속되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내가 없으면 일이 멈출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러나 내가 시작하지 않은 하나님의 일을 내가 끝낼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거대한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맡겨진 한 구간을 걷는 사람들입니다. 씨를 뿌리는 사람이 있고 거두는 사람이 있으며, 기초를 놓는 사람이 있고 그 위에 집을 세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마지막 장면까지 보느냐가 아니라, 내게 맡겨진 장면을 충실히 살아 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 이루지 못했다고 너무 아쉬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남겨 둔 일이 있다는 것은 실패의 증거가 아니라 인간의 한계를 받아들여야 할 때가 왔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내 손에서 끝나지 않은 일이 하나님의 손에서도 끝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을 성실히 하고, 내일의 몫은 하나님께 맡기는 것, 그것이 유한한 사람이 영원을 믿으며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인생은 모든 일을 마치고 떠나는 여행이라기보다, 맡겨진 하루를 잘 살다가 다음 사람에게 길을 내어 주는 여행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붙들어야 할 것은 미완성의 아쉬움이 아니라 오늘이라는 하루입니다. 모든 일을 다 이루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다만 오늘 해야 할 사랑을 미루지 않고, 오늘 해야 할 순종을 외면하지 않으며, 오늘 맡겨진 길을 성실히 걸으면 됩니다. 날을 세는 사람이 하루를 얻습니다. 바통은 결승선까지 혼자 들고 가지 않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편 90:12)
열린편지/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6.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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