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편지] 확성기가 목소리를 크게 만들 수는 있어도 아름답게 만들지는 못합니다.
1911년 3월 25일 토요일 오후, 서른 살의 프랜시스 퍼킨스는 뉴욕 워싱턴스퀘어 공원 건너편에 있는 친구의 집에 있었습니다. 소방차 종소리와 비명이 들려 밖으로 뛰어나가 보니 광장 너머 건물 위층에서 불길이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8층부터 10층까지 들어선 의류공장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대부분 가난한 이민자 가정의 젊은 여성들이었습니다.
출입문 하나는 잠겨 있었고 비상계단은 무너졌습니다. 소방 사다리는 높은 층까지 닿지 못했고, 아래에 펼친 안전망은 떨어지는 사람들의 무게를 견디지 못했습니다. 불길과 창문 사이에 몰린 사람들이 뛰어내리기 시작했습니다. 퍼킨스는 훗날 그 순간을 떠올리며 말했습니다.
“그들에게는 갈 곳이 없었습니다.”
그날 146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퍼킨스는 그 참사를 구경한 사람으로 남지 않았습니다. 훗날에도 그날을 떠올리며 “마치 우리 모두가 무언가 잘못한 것 같았다”고 고백했습니다. 안전을 지킬 법을 만들지 않은 사회와 위험을 알면서도 외면한 시민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는 그 책임을 한때의 슬픔으로 흘려보내지 않았습니다. 노동자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일에 자신의 생을 걸었습니다. 마침내 미국 최초의 여성 각료가 되어 노동부 장관을 지냈고, 사회보장제도와 노동환경 개선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날 불타는 창문을 본 사람은 많았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자신의 길을 바꾸지는 않았습니다. 사람의 품격은 무엇을 보았느냐보다 본 것을 어떻게 감당했느냐에서 드러납니다. 남의 고통을 자신의 책임으로 받아들인 순간, 퍼킨스에게 직업은 소명이 되었습니다.
데이비드 브룩스는 《인간의 품격》에서 인간의 덕을 두 가지로 나눕니다. 하나는 학력과 경력, 직위처럼 이력서에 적히는 덕이고, 다른 하나는 “정직한 사람이었다”, “어려울 때 곁을 지켜 주었다”라는 말처럼 추도사에 남는 덕입니다.
우리는 이력서를 채우는 데 많은 시간을 들입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읽힐 추도사는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평범한 날들의 선택으로 쓰입니다. 무엇을 가졌는가보다 사람들을 어떻게 대했는지가 남고, 얼마나 높이 올랐는가보다 누구의 손을 잡아 주었는지가 기억됩니다.
사람들은 높은 자리에 오르면 사람도 높아진다고 생각합니다. 큰 회사나 큰 교회를 맡으면 자신도 그만큼 큰 사람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자리는 사람을 높여 주기보다 그 사람을 크게 보여 줍니다. 확성기가 목소리를 크게 만들 수는 있어도 아름답게 만들지는 못합니다. 왕관은 머리를 빛낼 수는 있어도 그 안의 생각까지 빛내지는 못합니다. 큰 그릇은 많은 것을 담을 수 있지만, 깨끗한 것까지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따뜻한 사람이 힘을 가지면 더 많은 사람이 살아나지만, 오만한 사람이 힘을 가지면 더 많은 사람이 다칩니다.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한 판사의 죽음으로 시작됩니다. 그의 부고를 접한 동료들이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고인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비운 자리를 누가 차지할지, 그 일로 자신의 승진에 어떤 변화가 생길지를 따져 보았습니다. 그것이 평생 남들에게 인정받는 성공을 좇아온 이반 일리치에게 세상이 바친 추도사였습니다.
이반 일리치는 자신의 지위에 어울리는 집을 꾸미던 중, 커튼을 달기 위해 사다리에 올라갔다가 미끄러져 옆구리를 부딪칩니다. 그 뒤 원인을 알 수 없는 병과 통증에 시달립니다. 죽음이 가까워지자 그는 비로소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묻습니다. ‘혹시 내가 살아온 방식이 처음부터 잘못된 것은 아닐까?’
그는 남들에게 올바른 사람으로 보이는 데는 성공했지만, 정작 올바르게 살지는 못했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습니다. 세상이 세워 놓은 성공의 사다리는 부지런히 올랐지만, 그 사다리가 과연 바른 곳을 향하고 있는지는 한 번도 묻지 않았습니다.
조지 마셜은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육군참모총장을 지냈고, 전후 유럽 재건에 기여하여 노벨평화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앞두고 국회의사당 중앙홀 안치도, 국립대성당의 장례 예식도, 자신을 칭송하는 추도사도 원하지 않는다고 문서로 남겼습니다.
1959년 10월 20일, 그의 장례는 포트마이어 예배당에서 약 20분 동안 거행되었습니다. 현직 대통령과 전직 대통령을 비롯한 주요 인사들이 참석했지만 그의 업적을 낭독하거나 칭송하는 순서는 없었습니다. 집례자는 기도 중 단 한 번 그를 이렇게 불렀습니다.
“주의 종 조지를 받아 주소서.”
장군, 육군참모총장, 국무장관, 노벨평화상 수상자라는 긴 호칭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마지막에 남은 것은 ‘주의 종’이라는 한마디와 ‘조지’라는 이름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자신들이 이룬 일을 보고하며 기뻐했습니다. 칠십 인이 전도를 마치고 돌아와 주님의 이름 앞에 귀신들까지 항복했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기쁨을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그들이 이룬 일보다 그들이 누구인지를 보게 하셨습니다.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누가복음 10:20)
자신의 가치를 날마다 증명해야 하는 사람은 낮아지기 어렵습니다. 낮아지는 순간 자신이 사라질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이름이 이미 하늘에 기록된 줄 아는 사람은 낮은 자리에 서도 초라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자신을 증명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먼저 사랑받았기에 그 사랑에 합당한 사람으로 다듬어져 가는 사람입니다.
우리에게도 저마다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가 있습니다. 부모의 자리, 상사의 자리, 먼저 말하고 결정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 힘은 우리를 높이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낮은 곳의 얼굴을 더 잘 보라고 주어진 것입니다. 인생의 높이는 얼마나 많은 사람 위에 섰는가가 아니라, 높은 곳에 서서도 얼마나 낮은 사람 곁으로 내려갔는가로 결정됩니다.
세상은 성을 빼앗은 사람의 이름을 길게 기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며 한 사람을 살린 이름을 기억하십니다. 인생의 마지막에 남는 것은 화려한 직함이 아니라 짧은 이름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어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빌4:3)
열린편지/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26. 8.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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