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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은 이슬 한 방울로 하루를 삽니다

거짓 없는 진실 2026. 8. 28. 10:44

[열린편지] 풀은 이슬 한 방울로 하루를 삽니다

손턴 와일더의 희곡 《우리 읍내》 3막은 마을 언덕에 있는 공동묘지에서 시작됩니다. 아이를 낳다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에밀리가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람들 곁에 앉아 있습니다.
무대감독은 에밀리에게 원한다면 살아 있던 날 가운데 하루로 돌아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죽은 이들은 한목소리로 말립니다. 돌아가지 말라고, 살아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을 놓치고 사는지 보게 되면 견디기 어려울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도 돌아가겠다는 에밀리에게 시어머니 깁스 부인이 당부합니다.
“가장 대단한 날을 고르지 말아라. 가장 하찮은 날을 골라라. 그런 날조차 충분히 벅찰 테니까.”

에밀리는 열두 번째 생일을 고릅니다.
1899년 2월 11일 새벽, 그로버스코너스의 평범한 아침입니다. 신문 배달 소년이 지나가고 우유 배달 마차가 들어옵니다. 사람들은 늘 그랬듯 날씨 이야기를 나눕니다. 부엌에서는 어머니가 아침 죽을 젓고 있습니다. 에밀리는 그제야 어머니의 젊은 얼굴을 봅니다. 살아 있을 때는 한 번도 제대로 보지 못했던 얼굴입니다. 식탁에는 파란 종이에 싼 고모의 선물과 그림 엽서첩이 놓여 있습니다. 엽서첩은 훗날 에밀리의 남편이 될 이웃집 소년 조지가 추운 새벽 문 앞에 두고 간 것입니다. 어머니는 생일이라고 아침을 서둘러 먹지 말라며, 베이컨을 꼭꼭 씹어 먹어야 추운 날에도 몸이 따뜻하다고 말합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에밀리는 더는 견디지 못하고 애원합니다.
“엄마, 나를 한 번만 제대로 바라봐 주세요.”
그러나 과거 속의 어머니에게는 에밀리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아무것도 모른 채 다시 화덕으로 돌아서서 아침 죽을 젓습니다. 밖에서 아버지의 다정한 목소리까지 들려오자 에밀리는 끝내 울음을 터뜨립니다.
삶은 너무도 빨리 지나가는데, 우리는 정작 서로의 얼굴을 바라볼 시간조차 내지 못한 채 살아간다고 탄식합니다.
그러고는 세상에 작별을 고합니다. 째깍이는 시계와 어머니의 해바라기, 음식과 커피, 갓 다린 옷과 뜨거운 목욕물, 잠들고 다시 깨어나는 일에 하나씩 작별을 고합니다.
대단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떠나고 보니 하나같이 눈부신 것들입니다.
에밀리는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사람들은 살아 있는 동안 삶을 알아보나요? 매 순간을 정말 알아보나요?”
무대감독이 대답합니다.
“아니. 성인과 시인이라면 조금은.”

에밀리가 작별한 것들은 모두 이슬과 닮았습니다. 밤새 풀잎 끝에 소리 없이 맺혔다가 해가 떠오르면 흔적 없이 사라집니다. 이슬은 자루에 담아 창고에 쌓아 둘 수 없습니다. 내일 쓸 몫으로 남겨 둘 수도 없습니다. 오직 오늘 아침, 몸을 낮추어 바라보는 사람만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대개 큰 것을 잃었을 때는 압니다. 그러나 작은 것이 사라질 때는 무엇을 잃었는지조차 모릅니다. 매일 듣던 목소리, 식탁에서 마주하던 얼굴, 문을 열고 들어오는 발소리, “밥 먹었니?”라고 묻는 평범한 안부가 얼마나 귀한지는 그것을 더는 들을 수 없게 된 뒤에야 깨닫습니다.

하버드대학교의 심리학자 매튜 킬링스워스와 대니얼 길버트는 2010년 과학 학술지 《사이언스》에 흥미로운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연구진은 열여덟 살부터 여든여덟 살까지 2,250명의 스마트폰으로 하루 중 여러 차례 질문을 보냈습니다.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지금 하는 일과 관계없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지금 기분은 어떻습니까?”
조사 결과, 응답자들의 마음은 측정된 순간의 46.9퍼센트 동안 눈앞의 일에서 벗어나 다른 곳을 떠돌고 있었습니다. 깨어 있는 시간의 거의 절반을 몸과 마음이 서로 다른 곳에 머문 채 보낸 셈입니다. 그 순간의 행복을 더 잘 설명해 주는 것은 ‘무엇을 하고 있느냐’보다 ‘지금 하는 일에 마음을 온전히 두고 있느냐’였습니다. 즐거운 상상에 빠져 있을 때조차 눈앞의 일에 마음을 온전히 기울일 때보다 더 행복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의 하루도 다르지 않습니다. 밥을 먹으면서 오후 회의를 걱정하고, 아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답장할 문자를 생각합니다. 여행지에서는 눈앞의 풍경을 바라보기보다 사진 찍기 좋은 자리를 먼저 찾습니다. 몸은 오늘을 살고 있는데 마음은 자꾸 어제와 내일 사이를 오갑니다. 지나간 일을 되돌리려다 오늘을 놓치고, 아직 오지 않은 일을 걱정하다 눈앞의 사람을 놓칩니다. 그렇게 인생의 절반을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는 채로 보낸다면, 백 년을 산다 해도 우리가 온전히 살아 낸 시간은 과연 얼마나 될까요.

대니얼 카너먼은 우리 안에 ‘경험하는 자아’와 ‘기억하는 자아’가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경험하는 자아는 지금 이 순간을 살고, 기억하는 자아는 지나간 삶을 돌아보며 점수를 매깁니다. 그런데 기억은 흔히 가장 강렬했던 순간과 마지막 장면을 크게 남기고, 별일 없던 날들은 쉽게 지워 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억에 남을 만한 하루를 만들려고 오늘을 다 써 버립니다. 더 멋진 여행, 더 큰 성취, 더 특별한 사건을 기다립니다. 그러다가 훗날 인생을 돌아보며 별것 없었다고 말합니다. 평범한 날에 맺혔던 이슬을 세지 않은 사람의 계산입니다.
오늘을 내일을 위한 준비로만 여기면 인생 전체가 준비하다 끝납니다. 다 살았는데도 정작 살아 보지 못한 인생이 됩니다.

무대감독은 성인과 시인이라면 삶을 조금은 알아본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을 알아보는 눈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주어진 재능이 아닙니다. 추운 새벽, 에밀리의 문 앞에 엽서첩을 놓고 간 소년 조지는 성인이나 시인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날 에밀리를 생각했고, 마음에 떠오른 사랑을 작은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사랑은 특별한 날이 오기만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평범한 하루하루에 작은 흔적을 남깁니다.

시편 90편은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라는 표제를 달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한 세대가 사라지는 것을 지켜본 모세는 인간의 삶을 아침에 돋았다가 저녁이면 시드는 풀에 비겼습니다. 짧은 인생은 하찮은 인생이 아닙니다. 오히려 짧기 때문에 오늘을 함부로 흘려보낼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거창한 한 계절이 아니라 단 하루입니다. 곁에 있는 사람을 한 번 더 바라보고, 익숙한 목소리에 마음을 기울이며, 따뜻한 밥 한 끼를 감사히 받아먹는 하루입니다. 풀잎 끝에 맺힌 이슬처럼 작고 잠깐이지만, 바로 그런 것들이 우리를 오늘 하루 살게 합니다. 지혜는 내가 얼마나 오래 살지를 아는 능력 보다 오늘이 다시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그 하루 안에 찾아오신 하나님과 내 곁에 있는 사람을 알아보는 마음입니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편 90:12)
열린편지/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26.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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