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편지] 무(無)는 유(有)를 낳을 수 없습니다
천문학자 앨런 샌디지는 우주의 나이를 재는 일에 평생을 바친 사람입니다. 젊은 시절 에드윈 허블의 관측 조수였던 그는 1953년 허블이 세상을 떠나자, 스승이 수행하던 은하의 거리와 분포에 관한 관측 연구를 이어받았습니다. 이후 팔로마산의 200인치 망원경을 비롯한 여러 관측 장비로 우주가 얼마나 빠르게 팽창하는지, 그 팽창 속도가 어떻게 변하는지를 추적했습니다.
1970년 그는 「우주론: 두 수를 찾아서」라는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두 수는 우주의 현재 팽창률을 나타내는 허블상수와 팽창률의 변화를 나타내는 감속매개변수였습니다. 한평생을 건 학문을 두 수로 압축한 제목입니다. 특히 허블상수의 값을 놓고 천문학자들은 수십 년 동안 논쟁했습니다. 어느 값을 택하느냐에 따라 계산되는 우주의 나이도 거의 두 배 차이가 날 수 있었습니다. 그 논쟁의 한복판에 섰던 샌디지는 관측우주론의 대가로 인정받아 1991년 크라포르드상을 받았습니다.
그에게는 어떤 망원경으로도 볼 수 없고 어떤 숫자로도 적을 수 없는 질문이 하나 있었습니다.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언가가 존재하는가?”
어린 시절부터 거의 무신론자에 가까웠던 그는 오십 대에 성경과 기독교 사상을 탐구하면서 신앙을 갖게 되었고, 1983년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을 공개했습니다. 그는 훗날 하나님을 가리켜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언가가 존재하는지를 설명해 주시는 분”이라고 말했습니다.
과학이 그에게 하나님을 실험으로 증명해 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과학을 깊이 연구할수록 과학이 대답할 수 있는 질문과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의 경계가 분명해졌습니다. 망원경은 은하를 보여 주지만 왜 은하가 존재하는지는 말해 주지 않았습니다. 방정식은 우주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기술하지만, 왜 그런 법칙이 있으며 우주가 그 법칙을 따르는지는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이미 존재하는 세계에 익숙해져 이 질문을 잊고 삽니다. 익숙한 것과 당연한 것은 다릅니다. 해가 뜨고 씨앗에서 싹이 나는 일은 익숙할 뿐, 저절로 당연한 일은 아닙니다.
현대 우주론은 우주가 약 138억 년 전 극도로 뜨겁고 밀도 높은 초기 상태에서 팽창해 왔다고 설명합니다. 멀어지는 은하의 적색편이와 우주배경복사는 그 역사의 흔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빅뱅 이론은 우주가 초기 상태에서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설명할 뿐, 왜 우주가 존재하는지까지 대답하지는 않습니다. 과학은 첫 장면 가까이 다가가지만, 왜 그 장면이 시작되었는지는 말해 주지 못합니다.
우주가 양자 진공에서 생겨났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물리학에서 말하는 진공은 철학적 의미의 ‘절대적 무’가 아닙니다. 그 안에는 양자장이 존재하고 에너지 상태가 있으며 물리 법칙이 작용합니다. 비유하자면 배우는 없지만 무대와 조명, 공연의 규칙은 이미 마련되어 있는 셈입니다. 따라서 “그 무대와 법칙은 왜 존재하는가?”라는 근원적인 물음은 여전히 남습니다.
라이프니츠는 이 물음을 철학의 언어로 정리했습니다. 별과 나무와 인간은 반드시 존재해야만 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 역시 스스로 태어나기로 결정한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존재의 근거를 자기 안에 갖지 못한 것들을 아무리 많이 모아도, 존재 전체에 대한 궁극적인 설명은 얻을 수 없습니다. 다른 등불에서 불을 빌려 온 등불을 천 개 모아 놓아도, “맨 처음 불은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물음은 여전히 남기 때문입니다.
존재의 근원에 하나님이 계신다고 말하면 곧 이런 반론이 제기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셨다면, 하나님은 누가 창조했는가?”
그러나 기독교는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생겨나기 시작한 것은 그 존재의 원인을 필요로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주 안에서 생겨난 여러 존재 가운데 하나가 아닙니다. 그분은 다른 어떤 존재에게도 의존하지 않으며, 존재의 근거를 자기 안에 지니신 영원한 분입니다. 만일 하나님도 누군가에게 지음받으셨다면, 그분은 창조주가 아니라 또 하나의 피조물에 불과할 것입니다.
이러한 이성의 논증만으로 기독교 신앙 전체가 증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성은 존재의 근원이 있음을 가리킬 수는 있지만, 그분이 누구신지까지 온전히 보여 주지는 못합니다. 인간의 생각은 아무리 멀리 나아가도 결국 이성 한계의 문 앞에서 멈춥니다. 그 문은 하나님께서 안에서 열어 주셔야 합니다.
복음은 바로 그 문이 역사 속에서 열렸다고 선포합니다. 만물을 지으신 말씀이 한 아기의 울음소리와 함께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몸을 입고 배고픔과 눈물, 고통과 죽음을 몸소 겪으셨습니다. 십자가는 창조주께서 고통받는 피조물을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지 않으셨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과 허무가 우리 존재의 마지막 말이 아니라는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샌디지가 별빛을 좇으며 마주한 것은 우주의 나이를 결정하는 두 개의 숫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우주에는 근원이 있고, 그 근원에는 뜻이 있으며, 그 뜻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의 얼굴로 나타났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찾아낸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자신을 찾아오신 하나님 앞에 마침내 걸음을 멈춘 것입니다. 무에서는 유가 나올 수 없습니다. 우리는 아무런 뜻도 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먼지가 아닙니다. 우리를 존재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며, 잃어버린 우리를 되찾으시려고 그리스도 안에서 친히 찾아오셨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1:16–17)
만물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존재합니다. 그 창조주께서 잃어버린 우리를 찾아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제 남은 물음은 분명합니다. “나는 주님께서 내미신 손을 붙들 것인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한복음 1:12)
열린편지/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26.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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