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편지] 참된 평안은 통제권을 내려놓을 때 시작됩니다
스탠퍼드 대학교의 저명한 신경과학자이자 영장류학자인 로버트 새폴스키 교수의 <왜 얼룩말은 위궤양에 걸리지 않는가 (Why Zebras Don't Get Ulcers)>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은 부분 중 하나는 '사회적 서열과 통제감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다룬 대목입니다. 새폴스키는 자신이 오랫동안 연구한 아프리카의 개코원숭이 사회를 예로 듭니다. 개코원숭이 사회는 매우 엄격한 위계질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새폴스키의 연구팀은 원숭이들을 마취총으로 쏘아 혈액을 채취하여 스트레스 호르몬 수치를 분석했습니다. 그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서열이 낮은 수컷일수록 안정 시에도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 수치가 높았고, 고혈압과 같은 스트레스성 질환의 징후가 뚜렷했습니다.
이 원숭이들은 먹이가 부족한 것도 아니었고, 포식자의 위협에 더 노출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병들게 한 것은 바로 '사회적 스트레스'였습니다. 서열이 높은 원숭이에게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하고, 짝짓기 기회를 박탈당하며, 먹이를 먹을 때도 눈치를 봐야 하는 등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한 상태가 만성적인 스트레스 반응을 유발한 것입니다. 이 만성적 스트레스가 결국 생리적 시스템을 망가뜨리는 독(毒)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원숭이 사회만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합니다. 새폴스키는 개코원숭이의 사례가 인간 사회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는 점을 설명하기 위해 영국 정부 기관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한 유명한 연구인 '화이트홀 연구(Whitehall Study)'를 인용합니다.
이 연구는 1967년에 시작되어 수십 년간 이어진 대규모 연구로, 공무원들의 건강과 사회적 지위를 추적 조사했습니다. 일반적 예상과 달리, 업무 스트레스가 가장 심할 것으로 예상되던 최고위 관리직은 오히려 심장병과 같은 스트레스성 질환 발생률이 낮았습니다.
최고위직(행정관)부터 최하위직(단순 노무직)까지 계급이 한 단계 내려갈 때마다 심장병으로 인한 사망률이 꾸준히 증가했습니다. 최하위직은 최고위직에 비해 심장병 사망률이 무려 4배나 높았습니다. 연구팀은 흡연, 비만, 운동 부족 등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다른 위험 요인들의 영향을 제거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요인들을 모두 보정한 후에도 계급 간의 건강 격차는 여전히 뚜렷하게 남아있었습니다.
결정적인 요인은 '업무에 대한 통제력(Job Control)'이었습니다. 고위직 공무원들은 업무량은 많고 책임감도 막중하지만, 자신의 업무 일정, 방식, 내용에 대해 상당한 재량권과 통제권을 가집니다. 그들은 예측 가능하고 자율적인 환경에서 일합니다. 반면, 하위직 공무원들은 업무 강도는 낮을지 몰라도, 상부의 지시를 일방적으로 따라야 하고, 업무의 자율성이나 재량권이 거의 없습니다. 그들의 일은 단조롭고, 예측 불가능한 요구에 시달리며, 자신의 노력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느낌(보상 불균형)을 받기 쉽습니다. 화이트홀 연구는 사회경제적 지위가 건강에 미치는 영향이 단순히 돈이나 의료 접근성의 차이 때문만이 아니라, 일상에서 느끼는 자율성과 통제권이라는 심리적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을 명확히 증명했습니다.
새폴스키는 개코원숭이 연구와 화이트홀 연구를 통해 일상에서 느끼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무력감, '부당하다'는 좌절감, '인정받지 못한다'는 소외감이 단순한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심리적 스트레스는 몸의 생리 시스템을 직접 타격하여 혈관을 망가뜨리고, 면역력을 떨어뜨리며, 뇌세포를 파괴하는 실질적인 '독'으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로버트 새폴스키는 "왜 얼룩말은 위궤양에 걸리지 않는가?"라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스트레스에 대한 반응 시간과 종류의 근본적인 차이 때문이라고 합니다. 얼룩말은 사자를 발견하는 즉시, 아드레날린과 코르티솔 같은 스트레스 호르몬이 분비되어 심장이 빨리 뛰고, 근육에 에너지가 집중되며, 정신이 번쩍 듭니다. 이때 소화, 성장, 생식, 면역 같은 당장 생존에 필요 없는 기능들은 일시적으로 중단됩니다. 이는 목숨을 걸고 도망치는 데 모든 자원을 집중하기 위한 매우 효율적인 생존 전략입니다. 사자로부터 성공적으로 도망치고 나면 위협은 사라지는데 그러면 얼룩말의 스트레스 반응 시스템은 즉시 꺼집니다. 몸은 다시 평온한 상태(항상성)로 돌아가 풀을 뜯고, 소화 기능도 정상으로 돌아옵니다. 스트레스는 15분짜리 비상사태였을 뿐, 그 이후에는 더 이상 그 일에 대해 걱정하지 않습니다. 반면, 인간은 사자에게 쫓길 일이 거의 없지만 '심리적, 사회적 위협'에 대해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주택 대출금, 상사와의 갈등, 자녀의 성적, 교통 체증, 미래에 대한 불안감 같은 상상의 사자로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문제는 우리 뇌와 몸이 '실제 사자'와 '상상 속의 사자(걱정거리)'를 잘 구분하지 못하고 똑같은 생리적 반응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얼룩말의 위협은 15분 만에 끝나지만, 인간의 걱정거리는 몇 주, 몇 달, 심지어 몇 년간 지속됩니다. 그 결과, 스트레스 반응 시스템이 결코 완전히 꺼지지 않고 만성적으로 활성화된 상태로 유지됩니다. 이 '만성적 스트레스'가 질병의 원인이라고 말합니다. 스트레스의 파괴력은 객관적인 사건의 크기보다 개인이 처한 주관적인 심리 상태에 따라 결정된다고 합니다. 새폴스키는 얼룩말은 스트레스 반응 시스템을 생존을 위해 '잠깐' 빌려 쓰고 완벽하게 갚지만, 인간은 심리적 걱정 때문에 이 시스템을 '장기 대출'하여 결코 갚지 못하고, 결국 그 '이자(만성 질병, 심장병, 고혈압, 당뇨, 암, 우울증)'에 시달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새폴스키는 우리가 스트레스 자체를 없앨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스트레스는 삶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스트레스 반응의 '스위치'를 만성적으로 켜두는 대신, 필요할 때만 켰다가 제대로 끌 수 있는 방법을 배울 수는 있습니다. 운동을 통해 스트레스 반응을 위한 생리적 에너지를 건강하게 소모하고, 명상과 심호흡으로 부교감신경계를 활성화하여 몸을 이완시키며, 친구나 가족, 공동체와의 유대를 통해 사회적 지지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과학은 문제의 원인을 정확히 짚어냅니다. 우리 몸은 만성적인 심리적 스트레스를 감당하도록 설계되지 않았습니다. 운동과 명상, 좋은 관계가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근본적인 질문이 남습니다. 우리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울리는 경보음을 어떻게 끌 수 있을까요? 내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인생의 수많은 문제 앞에서 어떻게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있을까요? 여기에 바로 신앙의 역설적인 지혜가 있습니다. 세상은 더 많은 통제력을 가지라고 말하지만, 성경은 우리의 통제권을 온전히 내려놓으라고 가르칩니다. 이는 무기력한 포기가 아닙니다. 나보다 더 크고 선하신 분, 나의 모든 상황을 아시고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삶의 주도권을 겸손히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내가 통제하려 애썼던 삶의 무거운 짐을 그분의 손에 넘겨드릴 때, 비로소 우리의 영혼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자유와 안식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붙들고 있던 불안의 끈을 놓고, 그분께 삶의 통제권을 맡겨드릴 때, 우리의 마음과 몸을 짓누르던 '상상의 사자'는 힘을 잃게 됩니다. 그분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기꺼이 그 짐을 대신 져 주시겠다 약속하십니다. 그 약속 안에서 흔들리지 않는 평안과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11:28)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14:27)
열린편지/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5.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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