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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꾼은 밤의 길이를 재지 않고 아침을 기다립니다

거짓 없는 진실 2026. 9. 29. 15:01

[열린편지] 파수꾼은 밤의 길이를 재지 않고 아침을 기다립니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스물여섯 살에 체포되어 8년 형을 받고 감옥과 수용소에서 청춘을 보냈습니다. 그 경험에서 나온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는 새벽 다섯 시, 캄캄한 수용소에 레일을 두드리는 기상 소리가 울리면서 시작됩니다. 주인공 슈호프의 형기는 10년입니다. 빵 한 조각, 국 한 그릇, 바람을 피할 자리 하나에 온 신경을 쏟습니다. 먼 앞날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늘 하루를 넘기는 것이 그가 터득한 생존법입니다.
슈호프의 옆 침상에는 침례교인 알료샤가 있습니다. 소설 속에서 그는 신앙 때문에 25년 형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신약성경의 절반을 옮겨 적은 공책을 벽 틈에 감쪽같이 숨겨 둡니다. 작업을 나가기 전 모두가 잠깐 눈을 붙이는 동안에도 그는 그 공책을 펴 읽습니다.

하루 일을 마치고 누운 밤, 슈호프가 무심코 하나님께 또 하루가 지나간 것을 감사합니다. 그 말을 들은 알료샤가 말합니다. 당신의 영혼이 기도하고 싶어 한다고. 슈호프는 기도를 수용소 당국에 내는 청원서에 비유합니다. 위에 닿지 않거나, 닿아도 ‘기각’이라는 도장이 찍혀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알료샤가 믿음으로 산도 옮길 수 있다고 하자 슈호프가 비웃습니다. 침례교인들이 그렇게 기도해서 산 하나라도 옮겼느냐고 묻습니다. 알료샤는 뜻밖의 대답을 합니다. 자기들은 그런 것을 구한 적이 없다고. 주님이 세상 것 가운데 구하라고 하신 것은 일용할 양식뿐이라는 것입니다. 슈호프가 되묻습니다. “배급 빵 말이냐?”

웃다가도 서늘해지는 대목입니다. 슈호프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천국과 지옥은 믿지 못합니다. 감사는 남아 있지만 기대는 닳아 버린 사람입니다. 우리 신앙도 때로 그 자리에 머뭅니다. 식사 기도에서는 하나님을 부르면서도 내일을 계산할 때는 하나님을 셈에서 빼놓습니다. 슈호프의 모습은 수용소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현대인에게도 비슷한 피로가 있습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을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오래 기다리다가 기대하는 법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많습니다. 병든 가족을 위해 기도했고, 자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렸고, 막힌 길이 열리기를 바라며 오래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달라지는 것이 없으면 사람은 기대를 낮추는 것으로 자신을 보호하기 시작합니다. 더 기대하지 않으면 덜 실망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신앙 위기는 하나님을 부정하는 데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미래를 계산할 때는 하나님을 빼놓는 데서 나타납니다. 예배는 드리고 감사 기도도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아마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라고 미리 결론 내립니다. 신앙의 형식은 남아 있는데 기다림이 사라진 것입니다.
어쩌면 현대가 만들어 낸 가장 깊은 변화도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은 점점 기다리는 대신 계산하려 합니다. 1917년 막스 베버는 바로 이런 현대 세계의 한 특징을 ‘탈주술화’라는 말로 설명했습니다.

1917년 11월 7일, 막스 베버는 뮌헨의 학생들 앞에서 「직업으로서의 학문」을 강연했습니다. 그는 현대를 ‘탈주술화된 세계’라고 설명했습니다. 원리상 모든 것을 계산할 수 있다고 믿는 시대입니다. 강연 끝에서 그는 이사야서의 오래된 질문을 꺼냈습니다. “파수꾼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냐.” 베버는 새 예언자와 구원자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사람들이 그렇게 묻고 기다린 지 이천 년이 넘었다고 말했습니다. 기다리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니 각자 ‘오늘의 요구’를 감당하자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습니다.

그런데 역사는 묘한 장면을 겹쳐 놓았습니다. 바로 그날 페트로그라드에서는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한쪽에서는 구원자를 기다리기보다 오늘의 과업을 감당하자는 강연이 열렸고, 다른 쪽에서는 역사를 새로 만들겠다는 혁명이 시작되었습니다. 훗날 그 혁명에서 세워진 체제의 수용소를 배경으로 솔제니친은 슈호프와 알료샤를 세웠습니다.

초월을 밀어낸다고 인간의 기다림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기다리지 않으면 다른 무엇인가를 기다립니다. 혁명을 기다리고, 제도를 기다리고, 돈을 기다리고, 의학을 기다리고, 내 능력이 내일을 구해 주기를 기다립니다. 인간은 기다리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사회학자 피터 버거는 1969년 『현대사회와 신(A Rumor of Angels)』에서 한밤중에 울며 깨어난 아이를 이야기합니다. 아이가 무서워 울자 어머니는 품에 안고 “괜찮아. 다 괜찮아”라고 달랩니다. 버거는 이 평범한 장면에서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만일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이고, 결국 죽음이 모든 것을 끝내 버린다면 어머니의 “다 괜찮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라 아이를 안심시키기 위한 위로에 불과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은 사랑하는 이를 향해 본능처럼 “괜찮다”고 말합니다. 버거는 바로 이런 인간의 깊은 확신 속에서, 눈에 보이는 현실 너머에 어떤 의미와 질서가 있음을 가리키는 ‘초월의 신호’를 보았습니다.

성경에도 밤이 길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로마의 지배 아래 있던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는 노인이 살았습니다. 성경은 그를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고 부릅니다. 같은 성전에는 여든네 살의 과부 안나가 밤낮 금식하며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시므온은 젊은 부부가 데려온 아기를 품에 안았습니다. 왕의 행차도 아니었고 군대의 개선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아기를 “이방을 비추는 빛”이라 부르며 이제 평안히 떠날 수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안나도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던 사람들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시므온이 품에 받은 것은 로마의 몰락이 아니었습니다. 한 아기였습니다. 그의 기다림은 사건이 아니라 한 분에게서 끝났습니다.

믿음은 원하는 결과가 나올 때까지 낙관하는 기술이 아닙니다. 밤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지 못해도 아침이 누구에게서 오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남은 밤의 길이를 계산하기보다 아침을 가져오실 주님을 바라봅니다. 소설은 슈호프가 오늘은 거의 행복한 하루였다고 여기며 잠드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의 형기 삼천육백오십삼 일 가운데 하루였습니다. 모두가 남은 날을 세던 막사에서, 날이 밝기 전 벽 틈의 공책을 펴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어쩌면 그 수용소의 진짜 파수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남은 밤의 길이를 재지 않았습니다. 아침을 기다렸습니다. 아무리 기다림에 지쳐도 그날은 올 것이고 그날 죽음의 문을 통과하는 날 끝이 아니라 새 날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시 130:6)

열린편지/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6.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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