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편지] 경보기는 불을 알릴 뿐 길은 알려 주지 않습니다
1949년 8월 5일 오후, 미국 몬태나주 맨굴치 협곡 위로 공수소방대원들이 낙하산을 타고 내려왔습니다. 대장 왜그 도지를 포함한 열다섯 명이었고, 현장에서 기다리던 산불감시원 제임스 해리슨까지 합류해 모두 열여섯 명이 되었습니다.
협곡은 미주리강 쪽으로 열려 있었습니다. 도지는 강 쪽으로 이동하며 불을 잡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오후 5시 45분 무렵, 불길이 협곡을 건너와 강으로 가는 길을 막았습니다. 대원들은 방향을 돌려 허리까지 자란 마른 풀을 헤치며 비탈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바람을 타고 경사를 치받는 불은 사람이 달리는 속도보다 빨랐습니다.
도지는 발로 이길 수 없는 불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성냥을 그어 자기 앞의 마른 풀에 불을 놓았습니다. 풀을 먼저 태워 큰불이 태울 것을 없앤 뒤, 그 안에 엎드리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탈출화재’라고 부르는 방법이지만 당시에는 정식으로 훈련받은 전술이 아니었습니다.
도지는 대원들에게 자신이 만든 불탄 자리로 들어오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뒤에서 거대한 불길이 밀려오는 순간, 대장이 또 다른 불을 놓는 행동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대원들은 그를 지나쳐 능선으로 달렸습니다.
도지는 자신이 태운 땅에 엎드려 살아남았습니다. 럼지와 샐리는 능선 부근의 암벽 틈을 통과해 식생이 드문 바위 지대로 피신했습니다. 나머지 열세 명은 목숨을 잃었습니다. 해리슨의 회중시계는 오후 5시 56분에 멈춰 있었습니다.
이 비극 앞에서 살아남은 사람의 판단만 지혜로웠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럼지와 샐리도 도지의 의도를 정확히 이해하고 달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우연히 통과할 수 있는 암벽의 틈을 발견했습니다. 반대로 목숨을 잃은 대원들은 불과 몇 분 사이에 낯선 명령을 이해하고 생사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맨굴치는 인간이 얼마나 제한된 시간과 정보 속에서 판단하는 존재인지를 보여 줍니다.
노먼 매클레인은 오랫동안 이 사건을 조사하고 생존자들과 현장을 답사했습니다. 그가 남긴 원고는 1992년 《영 맨 앤드 파이어》로 사후 출간되었습니다. 그가 붙들었던 질문은 단순히 누가 옳았느냐가 아니었습니다. 마지막 몇 분 동안 그들은 무엇을 보았으며, 그것을 어떻게 이해했는가였습니다.
우리는 사실을 본 뒤 결정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과 결정 사이에는 ‘해석’이라는 길이 놓여 있습니다. 행동은 맨 뒤에 나오지만, 그 방향은 그보다 앞선 해석에서 정해집니다.
심리학자 멀리사 피누케인과 폴 슬로빅 등은 2000년에 발표한 연구에서 원자력 발전, 살충제, 자전거를 비롯한 23개 활동과 기술의 위험과 편익을 평가하게 했습니다. 한 조건에서는 항목당 약 5초, 다른 조건에서는 약 15초를 주었습니다. 시간이 촉박할수록 사람들은 좋게 느끼는 대상의 위험은 낮게, 편익은 높게 평가하고, 나쁘게 느끼는 대상은 그 반대로 평가하는 경향을 더 강하게 보였습니다. 이를 ‘감정 휴리스틱’이라고 합니다.
감정에는 감정의 일이 있습니다. 두려움은 위험을 알리고, 불편함은 마음의 상처를 드러냅니다. 그러나 두려움은 경보기이지 길잡이가 아닙니다. 경보기는 불이 났다고 알려 주지만 어느 문으로 나가야 하는지까지 결정해 주지는 못합니다.
민수기 13장의 열두 정탐꾼도 같은 땅을 정탐했습니다. 한 송이를 두 사람이 막대기에 꿰어 메야 할 만큼 풍성한 포도를 보았고, 강한 주민과 견고한 성읍도 확인했습니다. 그들이 본 현실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돌아와 그린 지도는 달랐습니다.
열 명은 성벽을 보는 순간 약속을 지웠습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민 13:31).
그 판단은 곧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 13:33).
앞 문장은 자신들이 확인한 두려움이지만, 뒷문장은 상대가 자신들을 그렇게 보았을 것이라는 추측입니다. 땅을 살피러 갔던 사람들이 두려움 속에서 자기를 줄이고 하나님을 셈에서 빼놓았습니다. 그 해석은 원망을 낳았고, 원망은 마침내 뒤로 돌아갈 길을 찾게 했습니다.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민 14:4).
하나님께서 앞에서 인도하고 계셨지만, 그들은 뒤로 데려갈 지휘관을 구했습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도 같은 성벽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위험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눈앞의 형편을 마지막 결론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출애굽을 이루시고 광야에서 먹이신 하나님을 성벽과 함께 보았습니다. 열 명은 자신과 적을 견주었고, 두 사람은 적과 하나님을 견주었습니다. 그래서 갈렙은 말했습니다.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민 13:30).
그렇다고 두 사람에게 지름길이 열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도 광야에서 사십 년을 걸어야 했습니다. 믿음은 보상을 앞당기는 기술이 아니라, 긴 광야에서도 약속을 놓치지 않게 하는 힘입니다.
우리 앞에도 견고한 성읍이 있습니다. 줄어드는 수입, 낫지 않는 병, 흔들리는 자녀, 막막한 노후, 풀리지 않는 관계가 날마다 경보를 울립니다. 두려움이 울린다는 이유만으로 믿음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 두려움에게 길까지 결정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있다면 종이 한 장을 꺼내 두 칸으로 나누어 보십시오. 한쪽에는 확인된 사실을, 다른 쪽에는 내가 두려움 때문에 덧붙인 예상을 적어 보십시오. 그리고 물어보십시오.
‘나는 지금 성벽만 보고 있는가. 성벽과 함께 하나님도 보고 있는가.’
신앙인은 성읍을 작게 보지 않습니다. 다만 그 성읍보다 하나님을 작게 셈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현실에 눈을 감는 일이 아니라 현실을 끝까지 보면서도 두려움에게 마지막 말을 내주지 않는 것입니다.
맨굴치 비탈에는 지금도 열세 개의 추모 표지가 남아 있습니다. 그것들은 극한의 순간에 목숨을 잃은 젊은 소방대원들을 기억하게 합니다. 동시에 우리에게 묻습니다. 마음속 경보가 요란하게 울릴 때, 우리는 누구의 음성을 따라 길을 정할 것인가.
경보기는 불을 알릴 뿐 길은 알려 주지 않습니다. 길은 우리보다 먼저 그곳을 지나가신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아야 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두려움에 사로잡힌 온 회중에게 말했습니다.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민14:9)
열린편지/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26. 9.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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