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글

잎이 다 진 뒤에야 나무가 보입니다

거짓 없는 진실 2026. 9. 14. 10:59

[열린편지] 잎이 다 진 뒤에야 나무가 보입니다

1930년 6월, 아에로포스탈의 남미 우편 노선 조종사 앙리 기욤은 산티아고에서 멘도사로 우편물을 싣고 안데스를 넘다가 눈보라에 갇혔습니다. 라구나 디아만테 부근 설원에 비행기를 내려놓은 그는 구조를 기다리다 마침내 걷기 시작했습니다. 지도도 길도 없는 눈밭이었습니다. 그 뒤로 닷새 낮과 네 밤을 걸었습니다. 손발은 동상으로 망가져 갔고, 잠이 들면 그대로 얼어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어느 순간 더는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아내가 떠올랐습니다. 눈 속에서 시신조차 찾지 못하면 아내는 그의 죽음이 법적으로 인정될 때까지 오랜 세월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보험금을 받는 것도 그 뒤의 일이었습니다.
그는 죽더라도 사람들이 찾을 수 있는 곳까지 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만치 눈 위로 드러난 바위를 향해 다시 몸을 일으켰습니다.

생텍쥐페리는 《인간의 대지》에서 기욤이 사람을 살리는 것은 결국 한 걸음, 그리고 또 한 걸음을 내딛는 일이라고 말했다고 전합니다.
그 한 걸음이 다시 한 걸음을 불렀습니다.
닷새를 걷고 난 뒤 그는 마침내 사람이 사는 곳에 닿았습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생텍쥐페리에게 그는 말했습니다.
“맹세컨대, 내가 한 일은 그 어떤 짐승도 하지 못했을 것이오.”
그 말은 인간이 짐승보다 강하다는 자랑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목숨만 생각했다면 이미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기 밖에 있는 누군가를 마음속에 품었을 때 그는 다시 일어섰습니다.

사람의 품격은 바로 그때 드러납니다.
품격은 옷차림에 붙는 장식이 아닙니다. 가진 것이 하나씩 벗겨진 자리에서 내가 누구를 생각하며 어떤 한 걸음을 더 내딛는가에서 드러납니다.

심리학자 제임스 페네베이커는 사람들이 고통스러운 경험을 글로 표현할 때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를 연구했습니다. 초기 실험에서 참가자들은 나흘 동안 하루 15분씩 자신이 겪은 힘든 경험을 적었습니다. 감정과 사건을 함께 써 내려간 사람들에게서는 이후 보건센터 이용이 상대적으로 줄어드는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그 뒤 글의 언어를 분석하자 흥미로운 점이 발견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원인과 결과를 연결하는 말, 자신의 경험을 이해하려는 통찰의 언어가 늘어난 사람들에게서 건강 개선과의 관련성이 나타났습니다. 물론 후속 연구에서는 이러한 효과가 크지 않거나 일관되지 않다는 결과도 나왔습니다.
그래도 한 가지는 생각해 볼 만합니다.
고통 그 자체는 미덕이 아닙니다. 상처받았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이 깊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미 일어난 상처가 내 인생 전체를 설명하도록 내버려 둘 필요도 없습니다.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는가”에서 평생 멈출 수도 있고, 언젠가는 “이 일을 지나온 나는 이제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품격은 패배했을 때만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겼을 때 무엇을 보는가에서도 드러납니다.
고대 역사가 폴리비우스는 아카이아 동맹의 기병대장을 지낸 사람이었습니다.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이 끝난 뒤 그는 다른 아카이아 유력자들과 함께 로마로 보내져 오랜 세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훗날 로마의 장군이 되는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와 가까워졌습니다.
기원전 146년, 폴리비우스는 스키피오 곁에서 카르타고가 불타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오랫동안 로마와 맞섰던 도시가 불길 속에서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승리한 장군이라면 환호할 만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스키피오는 불타는 도시를 한참 바라보다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서 언젠가 거룩한 트로이도 멸망할 것이라는 구절을 읊었습니다.
폴리비우스가 무슨 뜻이냐고 묻자 그는 로마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카르타고에 일어난 일이 언젠가 로마에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한때 로마의 인질이었던 역사가가 붙들어 기록한 것은 승전자의 함성이 아니라 승전자의 눈물이었습니다.
정상에 올라선 순간에도 언젠가 자신이 내려가야 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는 함부로 휘두르지 않는 절제가 생깁니다.

성경의 야곱도 평생 붙잡으며 살았습니다.
태어날 때에는 형의 발뒤꿈치를 붙잡았습니다.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의 명분을 샀고, 눈이 어두운 아버지를 속여 형의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라반의 집에서는 이십 년 동안 속고 속이는 계산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 삶의 방식이 얍복 나루에서 꺾였습니다.
한 사람이 날이 새도록 그와 씨름하다 그의 허벅지 관절을 쳤습니다. 그의 이름은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뀌었습니다. 해가 돋을 때 그는 절뚝이며 브니엘을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걸음은 불편해졌지만 그의 인생은 그때부터 오히려 깊어졌습니다.
세월이 흘러 백삼십 세가 된 야곱은 흉년을 피해 이집트로 내려갑니다. 그는 세계를 호령하는 왕이 아니라 남의 나라에 몸을 의탁한 나그네였습니다.
그런 그가 당시 최고 권력자인 바로 앞에 섰습니다.
성경은 그때 야곱이 한 일을 두 번 기록합니다.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고.”(창 47:7)
그리고 왕 앞에서 나올 때에도 다시 기록합니다.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고.”(창 47:10)
그 사이에서 바로가 나이를 묻자 야곱은 자기 인생을 이렇게 말합니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 47:9)
미화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원망하지도 않습니다.
험악했다고 말하면서 축복합니다.
젊은 야곱은 축복을 빼앗으려던 사람이었습니다.
늙은 야곱은 축복을 나누어 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보여 주는 삶의 품격입니다.
야곱이 늙어서 갑자기 훌륭한 사람이 된 것이 아닙니다. 그를 붙드신 하나님의 손이 오랜 세월 그의 움켜쥔 손을 펴신 것입니다.
그를 붙드신 손이 그를 절게 하셨고, 절게 하신 그 손이 끝내 그를 놓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보여 주는 품격은 자기 자신을 완벽하게 다스리는 사람의 자부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붙들렸기에 더 이상 모든 것을 붙잡지 않아도 되는 사람의 자유입니다.
인생의 후반전에 세상은 우리에게서 많은 것을 거두어 갑니다.
직함이 사라집니다. 기력이 줄어듭니다. 내가 결정하던 일을 다른 사람이 결정하고, 내가 쥐고 있던 것들은 다음 세대로 넘어갑니다.
그러나 그 계절에도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이 있습니다.
지난 상처를 원망으로만 남겨 두지 않는 한 걸음,
나보다 젊은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주는 한 걸음,
나에게 상처 준 사람을 미움만으로 기억하지 않는 한 걸음,
남은 사람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는 한 걸음,
그리고 마지막까지 누군가를 축복하는 한 걸음입니다.
눈밭의 기욤은 저만치 드러난 바위를 보고 다시 일어섰습니다.
야곱은 절뚝이는 걸음으로 바로 앞에 서서 축복했습니다.
삶의 품격은 한 번도 넘어지지 않는 데 있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씩 벗겨져 가는 순간에도 어떤 한 걸음을 더 걷느냐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에게 그 걸음은 홀로 걷는 걸음이 아닙니다.
우리보다 먼저 우리를 붙드신 하나님의 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겉사람이 쇠해 가는 것을 바라보면서도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인생이 사라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오히려 새로워지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삶의 마지막 품격은 많이 남기는 데 있지 않습니다.
많이 내려놓고도 사랑을 남기는 데 있습니다. 모든 것이 벗겨질 때 사람의 품격이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4:16)

열린편지/열린교회/ 김필곤 목사/2026.9.14.

 

카톡펌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