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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모는 혼자 힘으로 쓰는 모자가 아닙니다

거짓 없는 진실 2026. 10. 22. 09:50

[열린편지] 학사모는 혼자 힘으로 쓰는 모자가 아닙니다

로버트 새폴스키는 스탠퍼드 대학의 신경과학자입니다. 30년 넘게 케냐 초원에서 개코원숭이 무리를 연구해 왔습니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독자에게 대학 졸업식 하나를 떠올려 보라고 합니다. 학사모를 쓴 졸업생들이 휠체어에 앉은 할머니와 사진을 찍습니다. 고국의 전통 옷을 차려입은 이민자 부모들은 자랑스럽게 자식을 바라봅니다. 웃음과 포옹이 오가는 식장 가장자리에서는 한 사람이 쓰레기통을 비우고 있습니다. 새폴스키는 여기서 상상을 하나 해 보자고 합니다. 졸업생 한 사람과 쓰레기를 치우는 그 사람이 타고난 유전자와 엄마 뱃속에서 보낸 아홉 달, 어린 시절과 살아온 형편을 통째로 맞바꾼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학위복을 입는 사람과 쓰레기통을 나르는 사람도 바뀐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것이 자신이 말하는 결정론이라고 적었습니다. 사람은 스스로 고르지 않은 조건들이 빚어낸 결과라는 뜻입니다.

그 장면은 지어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새폴스키는 시카고대학의 한 대담에서 그날의 일을 들려주었습니다. 아들의 대학 졸업식이었습니다. 그는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자리에 앉아 있다가, 식장 한쪽에서 쓰레기를 치우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때 막 이름이 불려 단상을 걸어가는 졸업생과 그 사람을 나란히 놓고, 두 사람을 가른 것들을 하나하나 꼽았습니다. 자란 동네와 집안 형편, 안전하게 자랄 수 있었던 환경, 부모가 곁에 있어 준 시간 같은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도 우리는 곧 단상의 졸업생에게로 다시 눈을 돌리고, 쓰레기를 치우던 그 사람은 더 이상 떠올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유의지가 없다고 주장하는 자신의 두꺼운 책 『모든 것은 결정되어 있다』가 결국 그 사람을 바라보는 일에 관한 책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인간에게 '자유 의지'란 없으며, 우리는 스스로 통제할 수 없었던 원인들의 총합이라고 단언한 이유를 그의 책에서 세 가지로 들고 있습니다. 
첫째, 선행 원인 없는 시작은 없다는 것입니다. 행동을 관장하는 뇌의 신경 신호는 유전자, 태내 환경, 스트레스 호르몬, 배고픔 등 무수한 선행 원인의 연쇄 속에서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끈기와 노력조차 선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제력과 투지를 담당하는 전두엽은 20대 중반까지 가장 늦게 자라며, 어린 시절의 양육 환경과 사회적 조건에 결정적인 영향을 받기 때문에 노력할 수 있는 뇌를 갖춘 것 역시 통제 불가능한 운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셋째, 카오스 이론·창발성·양자역학도 자유 의지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예측할 수 없다고 해서 원인이 없는 것은 아니며, 미시 세계의 무작위성(제비뽑기)이 곧 주체적인 자유 의지를 뜻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성공에 우월감을 갖거나 실패와 범죄를 오롯이 개인의 탓으로 돌릴 수 없으며 비난과 응보 대신 위험을 인도적으로 '격리'하고, 서로의 뇌에 더 나은 원인이 되어 주는 연민과 환경 개선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의 주장에 다 동의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도 많은 철학자가 사람에게는 선택할 자유가 있다고 봅니다. 성경도 사람에게 자기 삶에 대한 책임을 묻습니다. 그래도 그가 보여 준 졸업식 장면은 우리에게 한 가지 질문을 남깁니다. 지금의 나를 나 혼자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밤을 새워 공부한 사람은 분명 나입니다. 시험장에 대신 들어가 준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밤새 공부할 수 있는 형편까지 내가 만든 것은 아닙니다. 같은 밤에 어떤 이는 생활비를 버느라 일터에 있었고, 어떤 이는 아픈 가족 곁을 지켰습니다. 나에게는 책상 앞에 오래 앉아 있을 수 있는 건강이 있었습니다.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집이 있었고, 넘어져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여유가 있었습니다. 이런 것들은 성적표에 적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이 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쉽게 잊습니다.

쓰레기통을 나르는 사람은 실패한 사람이고 학위를 받는 사람은 성공한 사람이라고 쉽게 단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학위가 사람의 가치를 정하지 않듯, 직업도 사람의 존엄을 정하지 못합니다. 사업도, 목회도, 자녀교육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과가 없다고 그를 무능력자로 낙인찍으며 정죄하고 비난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스스로 비관하며 우울감의 노예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우리가 돌아볼 것은 그 사람의 자리가 아닙니다. 그 자리만 보고 한 사람의 능력과 성실함을 서둘러 판단해 버리는 우리의 시선입니다. 남의 실패 뒤에 우리가 모르는 사정이 있듯이, 나의 성공 뒤에도 내가 잊은 도움이 있습니다. 누구도 지금의 자기가 되기를 스스로 선택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지금의 나는 온전히 내 힘으로 이룬 것인가'라는 질문을 한층 더 깊이 파고듭니다. 4세기 말 북아프리카의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명하시는 것을 주시고, 원하시는 것을 명하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주님이 명하시는 일을 해낼 힘이 제게는 없으니 그 힘을 먼저 주십시오, 그러면 무엇이든 원하시는 대로 명하셔도 좋습니다, 하는 고백입니다. 같은 시대의 수도사 펠라기우스는 이 기도를 못마땅해했습니다. 사람은 마음만 먹으면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말년에 쓴 『견인의 은사』에 그 일을 적어 두었습니다. 로마에서 한 동료 주교가 이 기도를 인용하자 펠라기우스가 격하게 반박해 하마터면 다툼이 날 뻔했다는 것입니다. 펠라기우스에게는 명령을 지킬 힘까지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가 사람의 의지를 무시하는 말로 들렸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이 새폴스키의 결정론과 같은 것은 아닙니다. 새폴스키는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이 스스로 고르지 않은 원인에서 나온다고 봅니다. 그러니 누구도 잘한 일로 칭찬받거나 잘못한 일로 비난받아 마땅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르게 말합니다. 사람에게는 잘못을 돌이켜 회개하고 하나님께 순종할 책임이 분명히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도 그 순종을 자기 공로로 자랑하지 못하게 합니다. 바울은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자기 수고를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 수고 위에 자기 이름 대신 은혜라는 이름을 적었습니다.

다시 그 졸업식을 떠올립니다. 박수가 터지고 사진기 불빛이 번쩍이자, 사람들의 눈은 곧 단상의 졸업생들에게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학사모 안쪽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거기에는 보이지 않는 바느질 자국이 겹겹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새벽같이 일하러 나간 부모의 땀이 있고, 그만두려던 날 붙들어 준 선생님의 한마디가 있습니다. 이름도 모르는 누군가가 지켜 준 안전한 밤들도 있습니다. 그 모자는 내가 고른 실로만 지은 것이 아닙니다. 받은 것들로 기운 것입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의 눈은 단상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행사장 가장자리에서 묵묵히 쓰레기통을 비우는 그 사람에게로 한 번 더 향합니다. 그리고 저 사람과 나의 자리를 가른 것이 내 공로만은 아니었다는 사실 앞에 섭니다. 그는 학사모를 쓴 채로 그 사람에게 고개를 숙입니다. 그 모자가 머리를 들게 하는 모자가 아니라 고개를 숙이게 하는 모자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나무는 제 나이테를 스스로 그리지 않습니다. 열매는 보이지 않는 뿌리 덕분에 익습니다. 조약돌의 둥근 얼굴은 물살이 깎아 준 것입니다. 달은 제 빛으로 빛나지 않습니다.

바울은 스스로를 높이던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전4:7)
열린편지/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6.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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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 겸손 · 감사 · 존엄 · 연민